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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샌들을 신고 오른 지리산 2박3일

by 비르케 2016.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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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싶더니, 서서히 날이 개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이렇게 여름 중 가장 서늘한 날을 보내고 나니, 과거 속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서늘했던 여름으로 기억되는, 지리산에서의 2박 3일이 그랬다.

 

당시 문학 소분과 활동을 하던 나는 어느 날 선배로 부터 지리산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 '지리산'의 영향으로, 지리산을 문학으로 먼저 접했기에 지리산은 내게 나름의 감흥을 주던 산이었다.

 

"이번 여름 지리산 가는 거 어때?"

어떤 선배가 말을 꺼냈다.

 

산이라고는 고향의 무등산 중봉 정도나 타봤을까, 그것도 내게는 엄청 힘들었는데, 그때의 나는 지리산 알기를, 무등산 중봉쯤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나마도 선배에게, 나는 산 타는 거 싫다 했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리산에 가는 걸 찬성했다.

 

선배가 내게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뭐 등산 마니아도 아니고, 그냥 산 좀 타고, 발 좀 담그면서 놀다 오면 되는 거지!"

 

그래서였던 걸까, 나는 그 날 정말 편안하게 집을 나섰다. 2박 3일 먹고 자는 데 필요한 것들은 거의 남자 선배들이 준비했기에, 그냥 여벌옷 몇 벌 만을 배낭에 넣고 지리산을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정작 가자고 했던 사람들이 사정이 생겼다며 안 나오고, 남자 선배들 셋과 여자후배 하나, 나까지 멤버가 다섯 명 뿐이었다. 남자 셋에 여자 둘,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문학 전공인 우리 학과 특성상 여학생들의 입김이 거셌던 데다, 학생운동 시절이라 그중 다수가 남녀 구별 없는 철야 투쟁을 밥 먹듯 하던 때였으니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때였다. 한 선배가 놀란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너 그거 신고 가려고?"

내 샌들을 가리키고 있는 선배.

"응, 왜?"

"다른 신발 없어?"

"없는데? 산에 갈 때 샌들 신으면 안 돼?"

선배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하는 내 말에 대답을 찾지 못 했다.

 

그렇게 지리산행은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몰랐기에 용감했던, 참 무모한 산행이었다.

 

비에 흠뻑 젖어 노고단 정상에 서니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희열이 느껴졌다. 노고단까지 버스가 올라오는 게 보였지만, 그걸 알고서도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올라가던 내내 아래로 드리워진 안개의 강이 나를 충분히 매료시키고 있었기에... 지금도 지리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기도 하다.

 

2박 3일의 산행 동안 나는 여름 속 서늘함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내게, 산 속의 밤은 상상도 못할 두려움이었다. 그 고요하면서도 서늘함... 아니, 살을 에는 것만 같은 추위로 이틀 밤을 진저리쳤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간 산행에, 선배들이 그나마 자신의 옷을 선뜻 양보해 주어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저 샌들을 신고 지리산 노고단-피아골 코스를 다녀왔다. 양말도 없이 올랐다가 물집으로 고생하는 걸, 선배들이 물집도 잡아주고, 양말도 빌려주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목 늘어난 양말에 담긴, 후배를 챙기는 선배의 사랑이 새삼 고맙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지리산은 오르는 사람이든 내려오는 사람이든, 서로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세요~" 또는 "수고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는 지친 산행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 인사가 다반사였던 지리산에서 나를 접한 사람들은 이렇게 한 번 더 묻곤 했다.

"그 신발을 신고 올라온 거에요?"

 

어떤 이는 그랬다.

"사람 맞아요? 어떻게 그 신발을 신고 지리산엘 왔지?"

 

덕분에 피아골을 지나는 동안 만난 난코스에서, 선뜻 내미는 다정한 손길을 여러 번 접할 수 있었다. 아차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협곡을 지날 때마다 두려운 나머지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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