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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아날로그 시대, 겁없던 짠순이의 독일행-2

by 비르케 2016.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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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에 걸친 나의 독일행은, 우연찮게도 출발 날짜가 세 번 중 두 번이 10월 1일로 같았다.

목적지또한 세 번 중 두 번이 같은 도시였다. 


용감무쌍하게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거의 불가능했을 첫 독일행, 그러나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관련 이야기: 아날로그 시대, 겁없던 짠순이의 독일행-1

 


다가올 어떤 일들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막상 닥쳤을 때 의외로 술술 일이 잘 풀리곤 한다. 고민을 한다는 자체가 어쩌면 일종의 공을 쌓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된다. 


처음으로 외국행 비행기를 탔던 날, 프랑스를 경유해 독일로 들어가는 복잡한 루트를 굳이 항공권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나.


그렇게나 무모한 여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첫날 파리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간다면 그날 오후에는 도착할 것이라서 미리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간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만일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있던 독일 마르크 화폐 한 장을 프랑으로 바꾼 후 공중전화 카드를 샀다. 


프랑스는 경유만 하는 거라 지참한 돈은 모두 마르크화였는데, 결국 환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또 비용 추가다. 


사실 호텔에서도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 공짜로 묵을 수 없었고, 오를리 공항까지 오는 데도 짐 때문에 도저히 안될것 같아 택시를 이용한 후였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택시에 추가요금까지 붙었었다. 


절약정신만 충만했을 뿐, 어설픈 정보력이 가져온 작은 참사였다.


 


독일까지 비용때문에 매번 직항을 이용 못 하다 보니 이런저런 외국 동전들이 넘친다. 그중에 프랑스 프랑과 독일 마르크화만 놓고 찍어 보았다. 지금은 모두 유로화로 통합되었으니 이런 동전도 귀해진 셈이다. 


위에 한 줄이 마르크화, 왼쪽부터 50페니히(=1/2 마르크), 2마르크(앞), 2마르크(뒤), 1마르크(앞), 1마르크(뒤),10센트(뒤:1/10마르크). 프랑 동전은 1열이 10프랑(앞/뒤), 2열이 2프랑(앞)과 5프랑(앞), 3열은 1프랑(뒤/앞), 4열은 50센팀(=1/2프랑)이다. 


프랑스 프랑은 앞면의 디자인이 동전마다 대부분 일치하지만, 독일 마르크는 같은 화폐 단위에서도 도안이 몇 가지씩 상이한 게 특징이다. 요새 유로화와 비슷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하기 위해선 유일한 수단이 공중전화였다. 내 명의의 전화를 놓을 형편도 못 되었고, 공중전화도 맘 놓고 하지는 못 했다. 


12마르크짜리 공중전화 카드를 오래오래 쓰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말을 신속하게, 정확하게 해야 했던... 뉴스도 아니고... 

그때의 나에게가서 용돈 좀 주고 싶다, 정말. 

(숨은그림 찾기- 한국통신전화카드가 한장 끼어 있음)

 


예약해 둔 집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수화기를 통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을 예약한 ***입니다."


라고 나를 소개했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뭐라고?"

였다.

 

한국에서만 배운, 이른바 '됙일어' 발음 때문인지, 생활독일어가 아니고 책으로만 익힌 '호흐도이취(Hochdeutsch: 표준독일어)' 때문인지, 다시 표현을 바꿔봐도, 그녀는 '뭐래니?' 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조금씩 반응이 오긴 하는데, 그 반응도 어쩐지 미적미적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혹시 내가 가야 할 곳이 슬럼가나 이상한 동네인 건 아닐까, 집주인이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4년간 전공을 하며 다져온 내 독일어 발음이 그렇게까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 정도로 못 알아들으니, 집주인이란 사람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당일에 내가 올 거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그녀였을 텐데, 외국인이란 걸 감안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상상만 해봐도 어느 정도 미뤄짐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를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뮐루즈 공항에 도착했다. 

유학원을 끼고 온 게 아닌 나는 또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i' 가 있는 인포메이션 창구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바젤로 이동하려면 어떻게 가야 할지 무척 고민했는데, 고민을 하는 것도 일종의 공을 쌓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프랑스의 뮐루즈는 스위스 바젤과 공항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로 갈 사람은 '뮐루즈' 이정표 쪽으로, 스위스로 갈 사람은 '바젤' 쪽으로, 독일쪽으로 갈 사람은 '뮐하우젠'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창구에서 가르쳐준 대로 밖으로 나가니, 공항 밖에 정말로 프라이부르크로 가는 버스 푯말이 있었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밖으로 나오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10월 둘째 날, 우리나라 같으면 딱 좋은 날씨에 하늘은 푸르를 때였다.

하지만 바젤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고, 날씨도 으슬으슬 추웠다. 

가을 옷 차림의 나는 몹시 추웠고, 문득 마음까지 초라해졌다.

 

버스를 타서 내가 가야할 곳 주소를 기사에게 보여 주니, 자기가 내릴 곳에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 어떻게 왔냐며 물었다. 


한국에서 왔고, 에어프랑스를 탔고... 


내 독일어를 그가 잘도 알아듣고, 내 귀에 그의 말이 잘 들리니 갑자기 또 힘이 났다. 

기분이 상승 기류와 하강 기류를 반복해서 타고 있었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 근처에서 샀던 두 장의 엽서다. 

집에 보내기 위해 급히 샀었는데, 보낼 틈이 없어 가지고 있던 걸, 아직도 소유 중이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스마트폰 시대도 물론 아니었고, 카메라 하나 없던, 진정 '가난한 유학생'이었으니.. 


그때의 사진이란 것도 그나마 누군가가 찍어서 현상까지 해서 갖다준 고마운 사진 몇 장 뿐이다. 

 

 

아마도 내가 내렸던 곳이 프라이부르크 중앙역 근처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택시를 잡아 주소를 알려주니, 아름다운 도시 프라이부르크 한가운데를 휙휙 지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보았다. 아름다운 유럽의 풍경... 


파리에서도 하루를 지냈지만, 파리 중심은 워낙에 메트로폴리탄이다 보니 기대했던 모습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프라이부르크는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부르크주에 있는 프랑스 접경 도시다.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가 당시에 여행 루트를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거쳐 들어오게 한 것만 봐도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인근 도시들 중 가장 해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고,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흑림'이라 칭하는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가 가까이 있다.

 

나의 첫 독일행은 힘든 여정이었지만, 힘들었기 때문에 더 값진 경험이기도 하다. 


독일 생활의 시작을 열었던 프라이부르크에서의 생활은, 돌이켜보건대 좋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씁쓸한 기억들도 기억 한편에 자리한다. 


그 이상한 집주인 여자는 역시나 이상했고, 내 주장을 당당히 하는 내게, "이번 주 중으로 방 빼!"를 무기로 삼다가, 다음날이면 "너 그냥 여기 살아도 된다, 니 맘이지만."을 번복하곤 했다. 또, 나의 룸메이트 '페이샹 창'을 도둑으로 몰아 그녀의 눈가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한 것도 그녀였다.

 

독일인들의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naiv(영어의 naive)'라고 한다. 내가 만난 독일인들도 대부분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이상한 집주인을 만났으니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셈이다.

 

우울했던 그때, 나의 방 앞에 있던 나무가 자작나무였다. 4층이었던 집의 창문까지 다다른 그 나무는, 늦가을 샛노란 빛깔로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여 주었다. 



세 번째 독일행에서도 첫 번째처럼 외롭고 쓸쓸한 날들이 많았다. (물론 첫 번째와 세 번째를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즐거운 유학 생활을 두 번째 독일행에서 충분히 경험했으니 그걸로 됐다) 


내가 처음 독일에 갔던 때를 떠올리며, 블로그에서의 내 닉네임도 '자작나무'인 'Birke(독일어로 자작나무)'를 쓰게 되었다. 


참고로 이 블로그는 2009년 세번째 독일에 갔던 당시에 만들었던 블로그이다. 

그간 이 집을 비우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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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의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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