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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프라이부르크에서 만난 그녀들-1

by 비르케 201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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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는 내가 가장 처음 접한 독일 도시다. 10월 첫 날 한국을 떠나왔지만, 파리를 경유하다 보니 정작 독일에는 2일 오후에야 당도하게 되었다. 


도시는 온통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내가 처음으로 본 프라이부르크의 이미지는 '비 온 뒤의 또렷함', 낯선 곳에서의 생경한 아름다움이었다.

 

예약해 둔 하숙집에 도착했다. 


1층에서 벨을 누르니, 다짜고짜 "Just a moment!" 하고 영어로 답하곤 인터폰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거칠게 인터폰을 내려놓는 소리에 괜히 심기가 거슬렸다.  

 

비행기라고는 생전 처음 타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주인이 과연 나를 환대해 줄 것인가, 혹시라도 또 이런저런 이유가 생겨 짐을 이끌고 다시 고생길을 계속 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안은 채 4층 짜리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렸다. 나이 지긋한 독일여자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나타난 이는 의외였다. 단정하게 머리를 내려묶은 내 또래의 동양인 여자였다. 


"Hi~" 

인사만 던지고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내 이민가방 한쪽을 움켜쥐고 계단을 향해 앞장서 가는 그녀...

 

"내가 (네 가방 드는 걸) 도와줄까?"

라는 말을 먼저 꺼내고 허락 비슷한 싸인을 받고서야 움직이는 서양 사람들과 달리, '내가 네 마음이 되고 네가 내 마음이 되어' 이심전심의 경지에서 내 짐을 선뜻 들고 앞장서던, 늘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던 대만 출신 룸메, '창 페이샹(張培雙)' 그녀였다.

 

내가 묵을 집은 맨 윗층에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 페이샹은 영어로 "배 고프지?" 하고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배가 고플 것이라 짐작해 손은 이미 찬장부터 열어제끼고 있었다. 찬장에서 그녀가 꺼낸 물건이 또 한번 나의 눈을 의심케 했다. '辛(매울신)'이 쓰여진 우리나라 라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라면이 한국산인 줄 모르고, 오히려 손가락으로 '辛'을 가리키며, '이거 되게 매운데, 먹을 거냐'고 물었다. 두말하면 잔소리,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그 라면은 아니지만, 역시나 유럽 수출용 라면이다. 페이샹이 辛라면이 한국껀지 어디껀지 모를 정도로 외국에 나가면 일본 라면, 동남아 라면들 천지다. 물론 포장은 우리나라 라면에 비해 다들 작다. 


 

라면까지 얻어먹으며, 나는 내 앞에 있는 여자가 혹시 이 집의 하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가방을 날라다 주고, 식사까지 챙겨주는 걸로 보아 그게 아니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독일어로 뭔가를 물어보면, 엉뚱한 말을 영어 단어로 짧게 답하는 그녀... 그마저도 그녀의 영어 발음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단절감이 느껴져 왔다. 나중에 어학원에 가서야 알았다. 그녀가 독일어 입문 과정에 있음을, 그리고 독일어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와서 짧은 영어만으로 독일 생활을 하고 있음을.   

 

내가 페이샹과 지낸 몇 달 동안 우리의 의사소통은 '어설픈 독일어'와 '더 어설픈 영어'로 해결했다. 그러다가 안 되면 그때는 다크호스를 내보낸다. 다름 아닌 한자 설명...


 

 

이런 식이다. 이 낙서는 페이샹과 한 것이 아니지만, 딱 이런 식으로 서로의 의사를 표현했다. 페이샹은 이런 식의 설명에 늘 환호를 질렀다. 가슴이 뻥 뚫리는 소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일에서 독일어가 안 되니, 나 뿐 아니라 그 누구와도 소통이 힘들었던 게 당시 그녀였다. 그나마 나와는 이렇게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힘든 상황에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누군가를 만나면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 대로 페이샹은 페이샹 대로 그 집에 살면서 집주인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래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페이샹과는 몇 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처음 프라이부르크에서 페이샹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의 독일 생활이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때 이후 몇 년 뒤, 두 번째로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가게 되었을 때, 그때도 역시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나의 눈은 본능적으로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만 찾았다. 


어딘가 페이샹 같은 이가 나타나, 내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해 주고 따뜻한 음성으로 초행인 나의 손을 꼭 붙들어 줄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감 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친구는 다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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