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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프라이부르크에서 만난 그녀들-2

by 비르케 2016.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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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에서 만난 그녀들-2.

 

오늘의 주인공은 당시 내가 살던 곳의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주인이다. 그녀는 이혼한 여자로, 따로 수입이 없는 주부다 보니 주변 어학원에 등록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고 있었다. 프랑스 공항에서 처음 그녀와 통화했을 때의 그 막막감은 사는 동안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눈치가 없었던 건지, 상대의 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던 건지, 하필 나와 이름이 비슷했던 그녀는 내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 가지고 놀았다.

 

 

"**이랑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응, 나야."

 

영어든 독일어든 나와 통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해서, 한국에서 전화를 건 내 가족, 또는 어학원 친구들을 당황하게 만들곤 하던, 어쨌거나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그녀였다. 그때는 핸드폰 같은 게 없던 시대니,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달라 해서 통화하는 게 일상적인 때였다. 

 

영어든 독일어든 상대방의 어눌한 표현과 발음을 들으면 자기 전화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나와 그녀가 하필 이름이 비슷하단 이유만으로 내게 전화를 건 사람들은 매번 통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결국 내게 전화 거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그나마 친해지기 시작한 친구들에게서 전화 한 통이 안 오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그 일로 몇 차례 껄끄러운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러다 결국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내가 쓰던 방은 원래 거실이었는데, 나와 나의 룸메 페이샹의 방으로 개조해 쓰고 있었다. 어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나는 어학원 측에서 내게 소개한 그 방이 그리 싸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야 독일 방 시세를 몰랐으니 내라는 대로 냈지만, 나중에 보니 더블룸(Doppelzimmer)인데도 원룸(Einzelzimmer)을 쓰는 다른 친구들과 같은 방세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어학원에다도 말을 했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주인과 직접 이야기 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서 바로 집주인과 이야기를 했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고 방값을 내려달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 그래, 알았어." 하던 그녀가 잠시 후에 바닥을 쾅쾅 울리며 다가와 노크를 했다.

 

"이건 잘못된 거 아니니? 난 분명히 어학원과 이 가격에 세를 놓기로 약속하고 세를 놓았단 말이야, 그런데..."

그녀의 화는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는 할 말을 잃고 있는 내게 떨어진 불벼락,

"이번 주 중으로 방 빼!"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주인이 방을 빼라니, 어쩔수 있나...

그냥 '알았다'고 했다.

 

처음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던 그때처럼, 또 아주 쿨~하게 생각했다. 

'지천에 널린 게 게스트하우슨데 뭐. 안 되면 유스호스텔도 있잖아. 더 안 되면 짐은 락카에 넣고 역에서 밤 좀 세우지 뭐.'

어쨌거나 비이성적으로 흥분상태인 주인의 모습을 보니 그녀와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당장 나가라고 하면 나의 기세가 꺾일 줄 알았는데 '알았다'고 하니 고민을 좀 했던 것인지, 얼마 뒤 그녀는 내게 아주 친절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너 이렇게 할래? 내가 우리 큰딸이 쓰던 방을 줄게, 같은 월세에."

 

그녀의 큰딸은 다른 곳에서 공부하면서 간혹 집에 왔다. 나는 그 말에 얼른 화답하지 못 한 채, 나가는 게 나을지, 있는 게 나을지를 고민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 주기적으로 정신과에 다니고, 자신의 딸이 됐든, 나나 페이샹이 됐든 히스테리를 발산해야 끝이 나는 불안불안한 그녀를 한집에서 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진 말이 내 마음을 붙들었다.  

"니가 원한다면 텔레비전도 넣어줄게!"

 

이럴 수가... 가난한 유학생 신분에 어찌 감히 텔레비전까지... 그런 호사는 생각도 못 했다. 지금이야 유학을 가도 별걸 다 챙겨 가고, 가서도 필요한 물건은 많이 망설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독일이란 나라와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지금처럼 갭이 작지 않았다. 먹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외의 물건, 특히 텔레비전 같은 공산품은 유학생으로서 가지기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칼라 시대에도 흑백 텔레비전을 안 버리고 보는 사람이 여전히 많던 90년대 독일이었으니, 나 같은 가난한 유학생에게 텔레비전이란 더 엄청난 물건이었다.

 

사진 속의 텔레비전은 당시의 것은 아니고, 몇 년 뒤 어느 친구가 여행가면서 당분간 보라고 내게 빌려준 것이다. 프라이부르크에서의 그 텔레비전도 이것과 같은 흑백 텔레비전이다.

 

그렇게 해서 텔레비전까지 딸린 방에서 여유있는 나만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방세를 내고도 페이샹은 내가 나가고 난 휑한 방에서 밤마다 불면에 시달렸다. 잠이 들어도 누군가 자기 방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자꾸만 잠이 깬다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방에 있는 가구들이 가끔씩 다르게 놓여 있고, 쓰지도 않는 붙박이장에 뭔가가 자꾸 쟁여진다는 것이었다. 페이샹이 덧붙이기를, 주인이 자기 방에 드나드는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 하나를 내게 내줬으니 수납할 만한 곳이 없어서, 원래 거실이던 페이샹의 방 붙박이장에다 자기 물건을 갖다놓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페이샹과 의사소통이 잘 안 돼서 말해도 몰랐던 것인지, 아예 무시하고 말조차 안 한 채 그 방을 들락거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유야 어쨌건, 페이샹이 입장에서는 분명 기분이 나빴을 일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페이샹이 대만에서 가져온 보온병이 깨져 있었던 것.

 

지금과 달리 그때의 보온병은 속이 유리인지 뭔지, 일단 떨어뜨리면 깨지고마는 소재로 되어 있었다. 페이샹은 이때다 싶어 집주인에게 따지기 시작했고, 집주인은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깬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페이샹에게,

"니가 내 숄 가져갔지? 누구 맘대로 내 숄을 써?"

하며 오히려 페이샹을 도둑으로 몰았다.

 

페이샹이 그녀의 숄을 쓴 건, 아주 춥던 어느 날, 덮을 걸 찾다가 자신의 방 붙박이장에 숄이 있어 덮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일로 페이샹은 또 "이번 주 중으로 방 빼!" 하는 선언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자기가 아쉬우니 나에게 그랬듯 페이샹도 붙잡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페이샹이 급하게 얻은 숙소로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 집에 들어갈 때 페이샹이 나를 도왔던 것처럼, 페이샹이 그 집을 떠날 때, 나도 그녀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페이샹이 없는 집은 더 악몽이었다. 그 집에, 심지어 그 도시에 더 있고 싶은 생각마저도 사라졌다. 프라이부르크는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그곳에서 만난 인연은 페이샹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뭔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학원이 아닌 대학에 들어가야 했고, 그러려면 어느 도시에 살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을 해야 했다. 꼭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엎고 뒤집어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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