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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중고책 속 아버지의 사랑

by 비르케 2018.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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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빡빡하게 꽂혀 있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년 째다. 아이들이 크면서 안 보게 된 책들과 한 번 읽고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을 추려 한 번씩 알라딘 중고매장에 판다. 책은 그래도 신간을 주로 사는 편이지만, 때로는 알라딘 중고매장을 통해 중고책을 구입할 때도 있다.

우리 가족은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라, 세월만 묵었을 뿐 얼룩이나 접힘이 거의 없는데, 중고로 책을 구입하다 보면 심한 경우도 종종 있다. 줄이 그어져 있기도 하고, 낙서나 얼룩이 있기도 하다. 분명히 상태체크에 '하'가 아니었는데도, 심지어 '상'이라 표기되어 있던 책들도 막상 받아보면 상태가 영 아닐 때가 있다. 개인대 개인간의 거래다 보니 상태 표시라는 건 이미 큰 의미가 없다. 이의 제기를 하고 반품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냥 읽는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책은 가격적인 면에서 크게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일 년전인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또 중고로 책을 구매했다. 이내 책이 도착하고 책장을 한 장 넘기자, 파란색 속지에 대각선으로 쓰인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2011년에 어느 아버지가 스무 살 된 아들의 생일선물로 그 책을 주며 남긴 메모였다. 아버지는 그 메모에 아들이 건강하길 바라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세월이 흘러, 스물 대여섯 살이 된 아들은 몇 년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선물한 이 책을 알라딘 중고매장에 내놓았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나 다른 사람이 내놓았을 수도 있다. 누가 되었든, 알라딘에 이 책을 올린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가 쓴 메모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 했을 것이다. 만일 알았다면 이 부분을 살짝 떼어 내고라도 보내지 않았을까. 손수 이름 지어준 아들의 한문명까지 공들여 써가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담은 메모라 왠지 맘이 짠했다.

아버지는 이 짧은 메모에서도 여러 번 아들에게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맨 아래 '사랑한다' 옆에는, 지우긴 했지만, 또 한 번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사랑한다 ○○야.' 라고.

그날 이 메모를 쓴 아버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또 아들은 그때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이지만, 이 책을 들출 때마다 나는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라도 이 책의 본 주인이 나타난다면 기꺼이 선물로 보내드릴 용의가 있다. 누군가의 소중했던 시간의 한 자락을 어디 택배비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 책으로 인해 마음 한편이 밝아지고 따뜻해지던 감사했던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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