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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장영희의 <괜찮아>, 그리고 숨바꼭질

by 비르케 2018.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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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진행 중인 어느 신도시 인근 동네에서 길을 멈춰선 적이 있다. 내 유년에 살던 동네와 분위기가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네 구석구석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한편에선 숨바꼭질을 하던 모습이 나도 모르게 오버랩 되었다. 지금이야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과거의 흔적을 찾기 힘든 곳이 되었지만, 이 골목처럼 내가 살던 곳도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기억 한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찾았다가 기억 속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 감정을 느꼈다. 내 기억에는 이 사진 속 골목 정도의 길인 것 같았는데, 수십 년만에 찾은 그 옛 길은 생각보다 매우 좁고 경사도 가팔랐다. 평소 길에 연관된 기억들이 좋은 편이라서 예전 그 골목의 모습도 잘 간직하고 있다 여겼는데, 기억이라는 것도 사실은 절대적으로 믿을만 한 게 아닌건가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했던 이 골목에서 그날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분의 수필이 있었다. 딱 이런 골목길에 어울릴만 한, 장영희씨의 <괜찮아>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글 첫머리 회상 부분이 그렇다. 고(故) 장영희씨는 영문학자이자 수필가, 번역가로, 어릴 적 소아마비로 목발에 의지해 평생을 살았다. 몸에는 장애가 있었지만, 밝고 희망적인 삶과 글로 많은 사람들이 아끼던 분이다. <괜찮아> 앞부분만 발췌해 올려본다.

 

 

장애가 있어도 동네 친구들 속에서 소외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골목길에서의 친구들의 배려 때문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와 함께, 골목에 찾아든 엿장수의 "괜찮아."라는 말 한 마디로, '인생이 그래도 살 만 하고 너그러움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삶에 임하게 되었다고도 이야기한다.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아도, 누가 공부를 잘 하고 못 하고, 누구네 집이 잘 살고 못 살고로 아이들의 패가 나뉘지는 않았다. 다 같은 동네 친구들, 언니오빠들, 동생들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책만 좋아하고 고무줄이나 오자미 같은 놀이에는 그다지 관심 없던 나도, 한번씩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서 동네를 누비며 놀던 때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놀이는 주로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였다.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의 술래는 '오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적어도 내가 살던 남도에서는 그렇게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 그 말이 일본 잔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뭐 그 단어를 기억하는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오니' 말고 '아따리' 또는 '아따리 꼬따리'로 불리던 존재도 있었다. 놀이에 으뜸인 아이도 아따리, 동네 어린 동생도 아따리였다. 즉, 함께 놀고 싶어도 일반적이지 않은 친구들을 열외로 놀이에 받아주던, 아이들만의 현명한 놀이 방법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애들끼리 노는데 언니 한 명이 "나도 끼워줄래?"하면 그 언니는 아따리였다. 급이 다르다고 함께 안 노는 것이 아니라, 언니는 룰을 정하고 룰에 직접 간여하는 역할을 하며 함께  어울렸다. 이런 경우 이제까지 어떻게 놀았든 언니가 만든 룰이 진짜 룰로 적용되곤 했다. 수가 짝수면 언니는 바둑에서 몇 집을 깔아주듯 불리한 조건에서 게임을 진행했고, 수가 홀수면 언니 한 명에 친구 두 명으로 균형을 맞췄다.

 

때로는 졸졸 따라온 동생을 아따리로 놀이에 끼워주기도 했다. 코흘리개 아따리는 술래한테 잡혀도 무한으로 살아난다. 마치 불사조처럼. 잡아봤자 허사라고 살려 두었다가는 기껏 잡아둔 '다음 술래'들을 터치해 다 도망가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술래는 일단 코흘리개 아따리 손을 꼭 잡고 '다음 술래'를 잡으러 다녔다. 한 명만 잡고 다른 아이에게 술래를 넘기는 게 아니라 그때의 '오니'는 동네 아이들을 잡을 만큼 다 잡아냈다. 때로는 놀다가 집으로 들어간 애들도 있었을 테고, 오니 노릇을 그만 하는데도 뭔가 룰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장영희의 <괜찮아>에 나온 동네 친구들도 몸이 불편한 주인공을 최대한 놀이에 참여시킨다.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아도, 본인이 하기 싫다면 몰라도 아이들은 동네 또래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무리 지어 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들끼리 서로 집안 내력을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서로 오며가며 먹고 입을 걸 나누던 사이였으며, 누구네 집에 어려움이 있는지 다들 아는 처지였으니 동네의 구성원들은 '그냥 한동네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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