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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여행.. 산책..

농장을 오가던 길, 농장다리

by 비르케 2018.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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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다. 광주광역시 동명동에 위치한 다리다. 100여 년 전, 이곳에 주택가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광주감옥 재소자들이 노역을 위해 농장을 오가게 되면서 '농장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때의 농장은 '법원'으로 탈바꿈 했고, 감옥이 있던 자리는 광주의 중심가로 변신해 갔다. 광주의 중심인 충장로, 금남로에서 법원으로 가는 길목의 중간쯤에 위치한 농장다리는 상전벽해 와중에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다리 일대는 원래 구릉지라서 주변보다 지대가 더 높다. 게다가 아래로 기차 철로까지 지나니 길이 위로 더 솟아 있다. 농장다리를 정점으로, 양방향 세 갈래씩, 총 여섯 개의 길이 다 이곳에서 내리막으로 흐른다.

 

인근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신구(新舊)의 조합이 다소 언밸런스한 모습이 되어 있지만, 어렸을 적에 이곳은 충장로와 금남로 번화가를 도보로 오가던, 이른바 핫플레이스였다. 사진 중앙의 길을 따라 가면 광주에서 가장 큰 시장인 대인시장과도 만난다. 예전에 이 인근은 사람으로 넘쳐났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예전과 한참 다른 모습이다. 그러니 아직까지 옛 모습 그대로인 건물들을 만나면 뜻밖에 오랜 친구를 보듯 더 반갑기만 하다.

 

지가 좋아 이 일대 지가도 꽤 상승했던 모양이다. 낯선 건물과 카페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도시 외곽으로 신도시가 퍼져나가다 보니 동명동 같은 구도심은 개발을 하다 말다, 그러다보니 그냥 땅만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아직 많은 것 같다.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은 예전 추억에 맘 놓고 젖어볼 수 있어 좋다. 이 안쪽으로가 내가 살던 동네인데, 기억 속 동네보다 미니어처가 된 것 같긴 해도, 드문드문 집들이 남아서 그나마 오랜 기억을 소환한다.  

 

쪽 3층짜리 건물은 '○○맨션'이라는 이름의 연립이다. 오랜 세월 이 동네 풍경의 한 자락을 장식하고 있는 곳이다. 그에 못지 않게 1층 '현대미용실'도 참 오래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인이었던 분이 고데기를 말아주면서, 열살 남짓한 내게 '새침데기'라 하기에, 집에 와 엄마에게 새침데기가 뭐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주인아주머니가 여전히 이곳에서 일하고 계신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외관은 거의 오랜 전 그 모습 그대로다.

 

시 동네를 돌다가 다시 농장다리로 돌아왔다. 다리에서 철길로 내려가는 곳은 새로 단장이 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농장다리의 정식 명칭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다리의 정식 명칭은 '동지교'였던 것이다. 사는 동안에 이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다리는 그저 '농장다리'였을 뿐.

 

장다리 아래, 철길이 있던 곳으로 내려왔다. 하루에도 무수한 기차가 내달리던 철길에는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밤잠을 설칠 정도로 시끄럽게 오가던 기차가 끊긴지는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기차가 다니던 철길이 이런 산책로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나니 낯선 감상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나마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고 아예 없애버린 것보단 낫다 위안하며 산책길을 따라 잠깐 걸어보았지만, 예전의 그 길은 확실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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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밤

 

캄캄한 방 안으로 기차는

요란한 빛을 던진 채 미끄러져 들어왔다

우리는 어렸고

철로변 집에 기차가 지날 때마다 눈을 감고서

저릿한 심장의 고동을 밤참처럼 받아먹으며

집 앞 구석에 심은 강남콩을 문득 떠올리곤 했다

 

두려움으로 아침마다 흙을 헤집고 강남콩 줄기를 들여보던

몇 날이 지나

어느 날엔가는 지나는 기차 소리에도 깜짝 놀라

이불을 당기던 밤이 있었고

한숨 자지 못한 아침마다는

창에 달라붙은 성에를 조심스레 문지르며

지난밤보다 덜 요란한 기차가

덜컹이며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

.

.

- 1992년 어느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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