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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세이쇼나곤과 향로봉

by 비르케 2018.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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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쿠라노소시>를 쓴 일본 헤이안 시대 뇨보(궁녀) 세이쇼나곤과 그녀가 모시던 중궁 데이시의 문답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궁께서 "쇼나곤, 향로봉의 눈은 어떠하냐?"하고 말씀하시기에, 말없이 문으로 가서 발을 말아 올렸고, 이에 중궁도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모두가 (그 시를) 알고 있고 와카로 읊으면서도 미처 생각도 못 했다. 역시 중궁을 모시기에 알맞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세이쇼나곤이 자신이 모시던 중궁의 질문에, 대답 대신, 문에 걸린 발(주렴)을 걷어 올린 것은,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의 한시에서 '향로봉의 눈을 주렴 걷고 바라보네'라는 구절을 떠올렸음이다. 말 대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녀의 모습에, 이를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졌을 중궁 데이시도 만족스런 미소를 지을 수밖에...

 

눈이 소복이 내리던 날, 이치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데이시(定子)의 방에 모여 뇨보(궁녀)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문득 창문 밖 세상이 궁금했을 중궁이 "향로봉의 눈은 어떠하냐?"하고 세이쇼나곤에게 물었던 것이다.

 

한겨울 따뜻한 방 안에서 창문을 통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떠올려 보면, 문득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보고 싶었을 중궁의 마음을 헤아릴 만도 하다. 그때는 유리창도 없었거니와, 화로에 불을 피운 채 여러 명이 한 방에 모여있다 보니 아마도 무척 답답하지 않았을까. 

중궁 데이시의 마음을 헤아린 세이쇼나곤이 떠올린 백거이의 시다. 백거이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한때 권세를 누렸으나, 말년에 좌천되어 강주사마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홀홀단신의 빈한한 삶이 한탄스러웠겠지만, 여산 향로봉 아래 초당을 짓고 살면서 안빈낙도의 삶에 차츰 만족한다. '사마'라는 직업도 늙은 사람에게 제격이라며, 세상 명리에서 벗어나 벗들과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 오히려 그는 감사한다.

 

백거이의 시를 와카(일본 정형시, 시를 노래 형태로 부름)로 부르면서도 그 뜻을 새기지 못 한 다른 뇨보들과 달리, 세이쇼나곤은 그 시의 참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에, 황후격의 지체 높은 주인 데이시의 마음과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에서 유래된 '지음(知音)'과도 같은 그런 마음 통하는 사람이, 살면서 딱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중궁 데이시와 같은 미소를 잃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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