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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악의 평범성, 소통부재 속 충돌

by 비르케 2018.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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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의 저작 중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다. 여기 등장하는 '아이히만'이란 인물은 유대인 학살의 주요 책임자이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다음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때 아이히만의 재판 보고서를 쓴 사람이 한나 아렌트였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치적으로 매우 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 자들일지라도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의외로 매우 평범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견해다. 전범들의 경우에도 개인적으로는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모습 그 자체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이 부족했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상을 자기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일상화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견해는 정치적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비난의 관점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그 누구라도 세상에 대한 편협한 세계관을 고수한다면 다수를 불행에 빠뜨리는 사악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즉, 악을 행하는 이들이 특별히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사악한 덫에 빠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최근 이런저런 사건들을 보자면 사람이 순식간에 악마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상대방을 흉기로 집중 공격한 20대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너무도 잔혹한 범행이라, 정신감정 끝에 심신미약이라는 명분으로 감형이라도 될까 우려한 국민들이 청원에 나설 정도다.

 

 

그런 마당에 그의 얼굴을 보고 쏟아지는 이런저런 편견들 또한 무섭다. 아무리 욱해서 벌인 일이라지만 그래도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만감이 교차할 텐데, 그런 이의 얼굴이 백만분의 일이라도 괜찮아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얼굴 관련, 외모 관련 댓글들 일색이니 그런 시선 또한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다.

 

확실한 것은,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는 그저 평범한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끔찍한 살인범이 된 것은 결국 소통의 부재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로 하면 될 일도 참고 또 참다가 감정 폭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시대라,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은 전시의 범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실에 적용해도 지극히 공감할 수 있는 견해다. 세상과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나의 생각이 편협화 되지 않도록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연이은 사건을 통해 누구든 한 번쯤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객관화 된 성찰이 없이는, 사악함을 행하는 자가 바로 내 이웃이 될 수 있고, 심하면 나 또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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