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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9

<아델라인 : 멈취진 시간>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이 주제는 생각보다 흔하게 소설이나 드라마 속 테마로 등장한다. 도 그렇다. 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 여성이 겪게 되는 사랑과 좌절,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암담함이 극 전반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흔한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한 인간의 영생에 그치는 것이 아닌, 아름다운 외모로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 이 영화를 위해 브라운관 앞에 또 앉게 된 것도 같다. 젊음이 수반되지 않은 영생은 고통이고 저주임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처음엔 좋을지 모르지만, 몸이 늙으며 겪게 되는 고통과 좌절을 죽어라 극복하며 사는 일,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그걸 점점 포기한 채 살게 될 일을 상상해 보면, 그다지 의미 있는 일로 보이지 않는다. 극 중 여주.. 2018. 8. 28.
10년쯤 전 독일에 있을 때, 동네에서 인사 정도 하며 지내던 필리핀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먼저 자신의 집에서 차 한 잔 하자며 나를 초대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니 현관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열네 살짜리 아들과 이목구비가 또렷한 그녀의 딸내미만 봐서는 그녀가 그들의 엄마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만 똑 떨어져 있으면 그 가족은 여느 독일 가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독일 남자와 국제 결혼한 여자였던 것이다. 독일인과 결혼한 그녀는 몇 년이 지나 필리핀에 두고 온 동생을 독일로 불렀고, 동생도 오래지 않아 독일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의 동생은 언니와 같은 도시에 살면서 자주 오갔는데, 그러다 보니 나.. 2018. 8. 26.
페이샹, 이벤, 그리고 렌 그녀의 이름은 '伊文'이었다. 독일에 두 번째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완 출신 그녀를 알게 되었다.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살다가 내가 있던 도시로 공부를 하러 온 음대생이었다.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당시의 나는 '페이샹'이라는 예전 친구를 많이 그리워했기에, 같은 동양인 여자애들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곤 했었다. '伊文'이란 자신의 이름을 두고, '네 이름을 한국에선 '이문'으로 발음한다'고 했더니, '이문'이든 '이벤'이든 발음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편하게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자기는 '패트릭'이 아니라, '빠뜨릭'이라 강조하던 어떤 애가 마침 떠올라, '이게 동양식 관대함이야.' 하며 웃었던 기억도 난다. 동양인들끼리는 일종의 '이심전심'.. 2018. 8. 25.
세이쇼나곤과 향로봉 를 쓴 일본 헤이안 시대 뇨보(궁녀) 세이쇼나곤과 그녀가 모시던 중궁 데이시의 문답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궁께서 "쇼나곤, 향로봉의 눈은 어떠하냐?"하고 말씀하시기에, 말없이 문으로 가서 발을 말아 올렸고, 이에 중궁도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모두가 (그 시를) 알고 있고 와카로 읊으면서도 미처 생각도 못 했다. 역시 중궁을 모시기에 알맞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세이쇼나곤이 자신이 모시던 중궁의 질문에, 대답 대신, 문에 걸린 발(주렴)을 걷어 올린 것은,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의 한시에서 '향로봉의 눈을 주렴 걷고 바라보네'라는 구절을 떠올렸음이다. 말 대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녀의 모습에, 이를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졌을 중궁 데이시도 만족스런 미소를 지을 수밖.. 2018. 8. 20.
두 번째 독일 입성기 나의 세 번 독일행 중에 두 번째 독일에 갔을 때의 일을 기억해보려 한다. 포스팅 전에, 나의 기억이란 건 사진으로 남겨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정도의 개인사적인 것이라서 특별히 볼 게 없음을 전제한다. 특히 이 이야기들은 이미 20년이나 묵은, 털면 먼지라도 일 것 같은 케케묵은 것들이라, 정보를 바란다면 더 더욱 그냥 패스해도 좋다. 이 포스팅은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블로그도 일기의 일환이라..) 유학이었는지, 어학연수였는지, 어쨌거나 유학이라 우기며 출발했던 이십대 중반 프라이부르크 행에서 오래지 않아 귀국해버린 후, 또 나간다는 말은 가족들에게 추호도 꺼낼 수가 없었다. 원래 생각은 집에서 한 학기 정도 입학허가서를 기다리며 쉬다가 바로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이었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이.. 2018.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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