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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아날로그 시대, 겁없던 짠순이의 독일행-1

by 비르케 2016.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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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일행은 총 세 번이었다. 그 중 첫 독일행은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진행되었다. 


대학 4년 동안 독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방학마다 있는 독일대학 연계 어학연수 프로그램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는데,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꿈이라도 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큰 획을 하나 긋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몇 달 후 가족들에게, 독일에 가겠노라 폭탄 선언을 했다. 혼자 독일 어학원을 알아보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어학 코스에 수강등록까지 마치고 난 뒤였다. 


그렇게 안 하면 또 다시 갈등을 하고, 결국 돈 걱정에 분명히 못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딱 6개월만 나를 밀어달라 말했다. 그 다음부터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버티겠노라고.

 

당시는 독일이 유로화가 아닌 마르크(DM)를 쓰던 때로, 내 계산대로라면 한달 40만원 이내로 살아갈 수 있었다. 현지 어학원에 연락해 값싼 방을 얻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대학생 배낭여행이 막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들이 많았던 때다. 그 여행사들은 경쟁적으로 싼 항공권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결국 가장 싼 티켓을 확보했다. 


당시에도 비행기표 가격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수요가 많아 상대적으로 싸지만, 그때도 아마 독일까지 3~6개월 내 왕복 조건으로 100만원 정도를 잡아야 했다. 


내 항공권은 에어프랑스를 이용해 거의 반 가격에 엄청 싸게 구매를 했다. 그러나 일정이 이랬다.


 

김포공항 국내선--> 김포공항 국제선-->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 1박 --> 프랑스 파리 오를리 공항--> 프랑스 뮐루즈 공항--> 스위스 바젤 --> 독일 프라이부르크

 


 


그때까지 나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대학때 남들 다 가는 제주 수학여행도 못 갔던 나였지만, 모르면 용감하다고, 비행기를 타는 일 정도는 아주 가볍게 생각했다. 

두려운 게 없던 나이였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국내 뿐 아니라 국외로 나가는 비행기도 모두 김포공항을 이용하던 시기였다. 나는 같은 김포공항이니 건물 안에 국내선과 국제선이 함께 있는 줄 알았다. 


또, 샤를 드골 공항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오를리 공항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내 생각으로 공항은 24시간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곳이니 눈 좀 붙인다고 쫓아낼 리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공항에서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오를리 공항으로 가면 될 거라 여겼다.

 

오를리에서 뮐루즈까지 다시 비행기.. 


그런데 여기서부터 좀 고민이 되었다. 바젤까지 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배낭여행 전문인 그 여행사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고, 나도 어학원에서 편지를 받자 마자 개강일이 빠듯해 부랴부랴 항공권을 구하면서 그저  싼 티켓만 찾았을 뿐 루트를 정확히 체크하지 못 했었다. 


바젤에서도 문제였다. 프라이부르크까지는 또 어떻게 갈까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여행지 어디든 'i (information)' 마크만 찾으면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 가서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그러나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가 아주 큰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근에 있던 나랑 비슷한 또래 한국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터였다. 그들에 의하면, 샤를 드골 공항과 오를리 공항은 완전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가느냐며 말을 걸어온 상대방이 오히려 나보다 더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외국 공항에 픽업 나올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여행길에 오른 나를, 어이없어 하기 보다 걱정해 주는 이를 만나서 다행이었다. 


일생에 딱 세 번 만난다는 귀인 중 한 사람이었을까, 그들 중 한 명이 나와 동향(同鄕)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한다. 전*희 언니... 친구들은 모두 결혼할 나이인 스물 여덟에, 오히려 공부를 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온 그녀였다.  

 

언니는 파리에서 하루 숙박을 한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미앵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어차피 어학원 측에서 픽업을 나올거니까 자기랑 함께 가자고 언니가 말했다. 


예약된 호텔이 오를리 공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니, 거기서 하루 묵고 독일로 출발하면 괜찮을 거라고 덧붙였다. 묵을 곳이 한인호텔이기 때문에 잘만 이야기 하면 추가요금 없이 자신들의 방에서 대충이라도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언니의 호의 어린 제의에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책 없이 떠난 나의 외국행이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원하던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인터넷이란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 시대에 정보란 결국 돈이었다. 


유학원을 통해 가거나 최소한 괴테어학원(Goethe Institut)처럼 비싼 어학원을 택해 가면 픽업까지 받으며 편하게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싼 비용까지를 감당해야 했다면 나의 독일행은 시작 전에 아마 좌절되었을 것이다.  

 


 


파리에 도착하니 이미 어둠이 깃들여 있었다. 언니의 픽업 차량을 얻어 타고 파리 중심으로 들어갔다. 


이상하리 만큼 전율이 느껴져 왔다. 국내에서도 이 도시 저 도시를 자주 여행 다녔던 나였지만, 가는 곳마다 그곳이 다른 곳이라는 느낌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당연히 같은 언어를 쓰고, 거리에 같은 한국어 간판들, 비슷한 건물들이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찾은 파리는 내가 알던 그 어느 도시와도 달랐다. 풍광이 다르고, 사람들이 다르고, 일단 말이 달랐다. 


내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왔다는 생각에 마음 한 편에서 불안과 희열이 동시에 교차했다. 

그리고 이내 이제까지와 다른 세상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찬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그 날 우리 세 사람은 파리의 밤을 거닐었다. 아니 활보하고 다녔다. 맘껏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길목에서, 우리가 왔던 길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낯선 도시의 밤을 걸었다. 그때의 그 즐거움이 아무리 세월이 지난들 잊혀질 리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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