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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남아 있는 나날 -3

by 비르케 2018.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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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달링턴홀에서만 살던 스티븐스에게

그의 새 주인 패러데이가 여행을 제안한다.

자신의 포드를 내주고 기름값을

지원하겠다는 말과 함께.

 

새 집을 인수한 후 직원에 대한 배려 차원의

선심이었을 테지만

달링턴홀의 집사로만 살아온 스티븐스가

노년에 접어든 시점에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켄턴양이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스티븐스에게는 여전히 '켄턴양'으로 기억되지만,

그녀가 달링턴홀을 떠나 결혼해

'벤 부인'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남은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제 앞에 펼쳐집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 편지를 읽으며

그는 어쩌면 캔턴양의 결혼생활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층 침실 아래로 보이던 잔디밭과

멀리 언덕진 초원의 풍경을 좋아했습니다."

 

달링턴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기도 했다.

 

"정자 앞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당신 부친을

우리 둘이서 지켜보던 그 순간이

결코 잊혀지지가 않아요. "

 

스티븐스는 그 순간, 자신이 보았던 장면을

자기 혼자가 아닌, 켄턴양과 함께 봤었다는 점을

기억해내고 불현듯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날 아버지는 무얼 찾는 사람처럼 찬찬히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근심에 젖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전,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쟁반에 받치고

그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져, 음식과 식기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건이 있었고,

앞으로의 만찬에 더 이상

손님들의 시중을 보지 말라는 달링턴경의

부탁이 있고난 뒤였다.

 

그 장면을 그녀와 함께 보던 날을 떠올리며

스티븐스는 착잡한 마음이 든다.

 

가녀리면서도 꼿꼿하고 야무지게

달링턴홀의 총무직을 수행하던

그 옛날의 캔턴양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총체적 난국'에 그녀가 어쩌면

한 자락 희망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그는 여행길에 접어든다.

 

먼 기억속의 어느 날, 켄턴양의 방 앞에서

노크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던

그 순간을 그는 떠올린다.

 

켄턴양은 그날 그에게 어떤 말을 하고자 했고,

마침 아주 바쁜 날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말을 뒤로 하고 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켄턴양의 방 앞에 섰지만,

그녀가 떠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에야 그 날을 떠올리며

스티븐스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가 바로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엿새간의 여행 동안

그는 아름다운 경치에 젖기도 하고,

그의 포드와 신사적 매너 앞에

너무도 친절해지는 사람들의 모습도 접한다.

 

그리고 드디어 켄턴양을 만난다.

 

스티븐스의 생각과 달리,

그녀는 그 옛날 자신을 붙들지 않은

스티븐스를 처음에는 그리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고,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고 하니

스티븐스의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달링턴홀로 돌아오기 전 그는

'위대한 집사'로 살기 위해 저버렸던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눈물을 머금는다.

 

이제는 다른 이를 주인으로 모셔야 하고,

자신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위대한 집사'에서

밀쳐져 쓸쓸하게 늙어갈 테지만,

남아 있는 나날 동안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여행 중에 스티븐스는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주인에게 너무 집착했군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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