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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추억이 담긴 나의 책, 제인 에어

by 비르케 2018.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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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냐는 질문에 요새는 얼른 답을 찾지 못 한다. 이 책도 좋고 저 책도 좋고,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 앞에서는 그저 생각의 연결고리만 더해질 뿐이다. 차라리 내가 읽은 책 중에 하나를 짚어 어떤 부분이 좋았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학창시절, 어떤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주저 없이 바로 대답을 하곤 했다. 그 책이 바로 '제인 에어'였다. 물론 지금과는 반대로 어떤 부분이 좋았냐고 묻는다면 그 부분에서 답을 찾지 못 했을 것 같긴 하다. '어떤 부분'이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렵게, 소설 속의 많은 부분들이 내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의 어떤 부분이 안 좋냐고 묻는 편이 오히려 더 답을 찾기 쉬울 것이다. 후반부 사촌들을 만나는 부분은 에러로 보인다. 아니 그보단 '옥에 티' 정도로 보인다고 하는 게 맞겠다. 집을 나가 고생하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들이 친척이었고, 친척 오빠가 나중에 청혼을 하게 되며, 그 친척 오빠는 선교를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 그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사실 그다지 비중 없게 휘리릭 지나간다. 전체가 장편임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정말 비중도 없고 재미도 떨어지는 부분이다. 아마도 남주 로체스터와의 재회를 더욱 애틋하게 만들기 위해 잠깐의 이별을 극중 배치하면서 시간적인 공간을 메꾸기 위해 설정된 플롯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의 관점이다.  

 

일단 좋아했던 소설을 두고 이렇게 안 좋은 부분부터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멈출 수 없는 감동의 도가니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책을 팔던 '책 세일즈맨'이 있었는데, 그가 카탈로그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건 읽었니?"하는 질문에, "읽었어요.", "이건?" 하면 계속 "읽었어요."를 반복하자 결국 믿을 수 없었는지 한 번씩 내용을 물었고, 그가 묻는 책의 내용을 태연하게 설명하는 걸 보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글자만 빼곡한 문학전집을 들이밀었다.

 

사실 우리집에는 변변한 책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 나는 책 속에 살았다. 친구네 집에서 보거나 빌려오기도 하고, 책 많은 큰댁에 거의 주말마다 다니며 책을 봤다. 아직도 친척들의 기억 속에는 '늘 책을 읽던' 내가 있는 듯하다.

 

그날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세일즈맨이 추천한 문학전집을 선뜻 결제했다. 신용카드도 없었을 때지만, 그때 표현으로 '월부'라는 게 있었는데, 일종의 할부로 책 구입을 했다. 판매사원이 다달이 집으로 할부금을 받으러 오는 시스템이었다.

 

문학전집은 금세 도착했다. 그때의 내 기분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그 50여권의 책을 내내 읽고 또 읽고 했으니 당연히 출판사가 어디였는지도 기억한다. 금성출판사 시리즈였다. 그 속에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처럼 유명한 러시아 거장의 책도 있었지만,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이나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 같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았다. 그때의 '제인 에어'도 국내에 그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나 둘 꺼내 보게 된 소설들 속에, '제인 에어'는 어린 내게 처음으로 '아련한 사랑'의 느낌을 안겨 주었던 책이다. '사랑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하는 걸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느꼈다. 전체 스토리는 그저 아기자기하지만, 구석구석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마음 조이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장면들이 어린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주었다. 그런 마음을 아마도 소녀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책을 읽다 보니 그전에도 간혹 '춘희' 같은, 어린 아이로서는 꽤 농도 짙은 작품도 이미 읽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제인 에어에서의 마음 속 파장은 '춘희'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외삼촌댁에 얹혀 살게 되었지만, 짓궂은 사촌들과 자기 아이들 편만 드는 외숙모에게 당당히 맞서는 모습, 기숙학교에서 겪게 된 쓰라림과 친구 헬렌의 죽음, 사랑 앞에서의 좌절, 영혼까지 사랑한 로체스터와의 사랑이 어린 가슴에 참 아련함으로 다가왔다.

      

읽고 또 읽었던 그 금성출판사 시리즈는 글씨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로 쓰여 있는 책이다 보니 본가를 떠난 이후 언제인지 모르게 처분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제인 에어'를 읽게 되었는데, 예전 금성출판사본과 달리 확실히 싱거운 감이 있다. 어린 눈으로 본 것과 성인이 되어서 본 것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번역의 차이고, 편집 단계의 내용 선별에서 뭔가 빠뜨리고 가는 느낌이 있다. 장편이다 보니 이를 단편화하기 위해서는 내용 선별이 과제인데, 이를 또 요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분명 놓친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제인 에어를 읽고 감동을 맛 본 나로서는, 있어야 할 부분에 빠져 있는 내용들이 뭉뚱그려진 느낌이 들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학창시절 감명을 받은 작품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스토리가 재미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스토리가 재미있는 책들은 도처에 깔려 있으니 분명 그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감동을 맛 본 이유 중 하나는 그 속에 깃든 마법과도 같은 언어의 유희와 상황의 반전 때문이었다. 단순히 시각적인 묘사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감각을 동원해 표현하고 있어서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고, 때로는 상상만으로도 안 되는 지적호기심 발로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부분은 다음 포스팅에 이어서 쓴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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