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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낯선 곳에서 다시 마주치는 인연

by 비르케 2018.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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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때 친구랑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생각코 선물로 책상용 화분을 하나 샀는데, 그날 그 친구도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샀다며 똑같은 화분을 내민 적이 있다. 둘 다 파란 색 화분에 심어진 나비란이었다. 순간 너털웃음을 날리고 말았지만, 뭔가 가슴에 섬뜩한 감을 느꼈던 건 나 뿐 아니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런 우연 같지 않은 우연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꼭 필연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순간에는 마치 필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더군다나 강렬한 직감과 맞닥뜨렸을 때 직관은 때로 논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물건을 잡아야 할 것처럼, 이 사람을 놓쳐선 안 될 것처럼.

 

대학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발단은 성적표가 잘못 배달된 데서 비롯되었다. 동네 명까지는 같고, 뒤에 번지수가 아주 미묘한 차이로 다른, 어느 남학생의 성적표가 우리집으로 배달된 것이다. 우체부의 실수였다. 이미 알고 있는 성적이었고, 찾으러 갈 필요도 없다 느껴서 그러고 말았는데, 그를 다음 학기 교양 수업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게 수업 마치고 차 한 잔 하자며 먼저 쪽지를 건넸고,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같은 동네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하면서 서로가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랑 그는 서로 작문도 같이 하고 문학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꼭 만났어야 했을 인연인 것만 같던 처음의 느낌이 깨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성적표의 개인 정보를 통해 나에 대해 안 그가 일부러 나와 같은 수업에 참여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우연 같지 않은 우연'은 결국 그가 '억지로 만들어낸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또 한 번의 그런 우연은 어느 늦은 밤에 발생했다. 시험 기간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사람들로 붐비던 대학 앞 상가 거리를 지나는데, 바로 정면에서 다가오는 남학생이 왠지 눈에 익었다. 서서히 가까워 올수록, "어... (어디서 본 사람인데..)" -> "어? (누구였지?)" -> "어~ (맞다, 소개팅)" 하며, 그가 언젠가 소개팅 했던 타 대학 공대생임을 알아차렸다. 상대도 거의 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 늦은 시각에, 바로 정면에서 마주친 그런 우연이 단지 우연에만 머물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짝만 비껴 지나갔어도 어둠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심취하고 퇴폐적으로까지 보이는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길 좋아했다. 덕분에 프랑스 문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때로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사람 같았다. 인문대학 내에 친구를 많이 둔 나고, 철학이며 문학이며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던 이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결코 염세적인 부류들은 아니라서 설령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죽지 않고 끝까지 씩씩하게 잘 버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악의 꽃'을 좋아하던 공대생 그는 달랐다. 늘 고민이 많고 어두워 그 그림자가 내게로 까지 번져오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그러니 그 필연으로 보이던 인연도 서서히 의미가 퇴색되어, 서로 데면데면 거리를 둔 채 멀어지고 말았다. 우연 같지 않는 우연이 필연인 것만 같았지만 결국 우연은 우연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살다 보니 국내에서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런 우연을 겪은 적이 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처음 도착했을 때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해 라커룸에 짐을 보관한 다음, 숙소를 구하러 갈 셈으로 로비로 나왔을 때 낯익은 동양인 한 명이 지나갔다. 독일에 가기 바로 몇 달 전, 지인과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그 지인의 지인, H였다. 그날 한 시간 정도 자리를 함께 하면서, '언니'라는 호칭으로 H에게 불리긴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H를 다시 만날 거라곤 전혀 상상을 못 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마주치기 어려운데, 더군다나 남의 나라에서 딱 마주치니 정말로 무슨 대단한 인연인가 싶었다.

 

- 뷔르츠부르크 중앙역 앞 -

 

H도 그렇게 마주친 나와의 우연을 그냥 우연으로만 넘겨버리진 않았다. 내게 선뜻 자신의 집에 묵으면서 함께 집을 구해보자고 했고, 라커에 보관했던 짐마저 다 꺼내오자고 했지만, 외국에서 신세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라커에 짐은 그대로 둔 채 일단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작은 기숙사로, 방 한 칸이 다였다. 욕실이나 화장실도 다른 학생들과 공유해야 했으니 라커에 짐을 두고 오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날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온다며 집을 나섰고, 늦게 들어올 테니 일단 자신의 침대에서 한숨 자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올까 해서 자다 깨다 하면서 결국 날이 밝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매우 피곤한 얼굴이었다. 역에서 나를 데리고 오긴 했는데 집이 좁으니 다른 곳에서 밤을 새고 온 것인지, 잠이라도 자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있다간 이 친구에게 폐를 끼칠 것만 같아서 일단 유스호스텔에 예약을 하고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녀를 더 볼 수는 없었다. 곧 다른 도시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숙사에 다시 방문했을 때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했을 뿐, 직접 아무런 기별도 전해듣지 못 한 채였다. 우연 같지 않은 우연을 통해 그녀도 그것이 필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녀와의 인연도 그렇듯 싱겁게 막을 내렸다.

 

지금의 나는 우연 같지 않은 우연을 더 이상 필연으로 연결짓지 않는다. 사람 뿐 아니라 장소, 숫자 등도 마치 필연인 듯 내 마음을 설레게 할 때가 있었다. 그쪽으로 가면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 알고 보니 예전의 어떤 장소라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그곳에 터를 잡아야 할 것만 같은 끌림, 동향(同鄕)의 어떤 이를 만나 동향이라 느끼는 안도감, 내가 좋아하거나 나와 연관된 숫자로 구성된 조합 등, 우연이라 하기엔 결코 우연 같지 않은 현상들에 이제는 쉽사리 맘이 움직이지 않고 의미 부여도 일단은 금물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선몽도 하고 예지력도 생긴다고도 하는데,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살면서 여러 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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