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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by 비르케 2018.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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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전 독일에 있을 때, 동네에서 인사 정도 하며 지내던 필리핀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먼저 자신의 집에서 차 한 잔 하자며 나를 초대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니 현관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열네 살짜리 아들과 이목구비가 또렷한 그녀의 딸내미만 봐서는 그녀가 그들의 엄마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만 똑 떨어져 있으면 그 가족은 여느 독일 가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독일 남자와 국제 결혼한 여자였던 것이다.

 

독일인과 결혼한 그녀는 몇 년이 지나 필리핀에 두고 온 동생을 독일로 불렀고, 동생도 오래지 않아 독일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의 동생은 언니와 같은 도시에 살면서 자주 오갔는데, 그러다 보니 나 또한 그들의 다과에 초대를 받고 우리집에도 두 사람을 초대하며 오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또래였던 그 동생과 어느 순간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동생의 이름은 '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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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 과거 독일에서도 '외국인 신부'에 관한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최소 10년은 앞서 대두되었던 주제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동남아 등지에서 신부를 사왔다. 사실이 그것과 다를지라도, 대부분의 신랑들은 자신이 신부를 사왔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아닌, 돈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노동력 착취와 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까지 번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렌의 언니의 결혼 생활이 바로 그랬다. 세월이 흘러 혼인 기간이 길어지고 독일 시민권자 자격도 얻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매달 남편 앞으로 나오는 연금은 남편만의 것이었기에, 안되겠다 싶어 남편 몰래 슈바르츠로 노인 수발을 하고 있던 그녀였다. 슈바르츠(schwarz)란 '검정색'을 일컫는 독일어인데, 탈세를 목적으로 소득을 신고하지 않고 일하는 것을 뜻한다. 그녀가 만나는 노인들은 대화도 거의 힘든, 죽음 직전의 사람들이었다. 때로 방문을 하면 생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이 침상에 쓸쓸히 누워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고된 일이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언제 빈털터리가 되어 고국으로 쫓겨날 처지가 될지 몰라 무조건 돈을 모으는 길만이 그녀가 살 길이었다. 그녀의 속사정을 알게 된 것은 물론 그녀의 동생 렌을 통해서였다.

 

렌의 독일 생활은 언니와는 달랐다. 언니가 있는 독일을 오가면서 언니의 소개로 만나 사귀다가 결혼하게 된 그녀의 남편은, 공부하고 싶다는 렌의 바람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렌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도움을 주려 애를 썼다. 남편의 지지와 사랑으로 렌의 독일 생활은 아주 성공적으로 보였다.

 

아무리 남편의 지지와 사랑이 있다 해도, 동남아인이라고 무시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주변 시선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 다문화 가족들의 삶과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10년 전 그때는 외국인 신부로 인한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한창 사회적 물의를 빚기 시작하던 때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외모가 다른 그들은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독일의 선례에서 보듯, '돈 주고 사온 신부'라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가를 치르고 사왔다는 생각으로, 외국인 신부를 처참하게 유린하다 못해 죽이기까지 했고, 참다못해 이들이 도망가고 가정이 해체되는 일이 당시에는 비일비재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다문화 가정의 모습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이들을 위한 복지도 함께 뒷받침 되었고, 사람들의 인식도 서서히 개선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독일의 사례에서 이미 본 바 있다. 그들의 2세들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도 사회적 차별의 희생양으로 자라났기에 어릴 때부터 또래 집단에 끼지 못 하고, 심지어는 한국말도 서툴고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 한 채 학업을 접어버리기도 했다. 다행인지 뭔지, 요즘 애들 추세가 점점 집단에 적응하기 싫어하고 '1인 문화' 형태로 바뀌어 가다 보니,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희석되어 보일 수 있지만, '아웃사이더'로 자라난 그들이 사회의 또 다른 '아픈 손가락'임은 분명해 보인다.

 

 

2010년 독일을 떠나올 무렵, 어학코스를 다니며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이던 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당시는 글로벌 경제 위기의 파장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또 한 번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걱정하던 그녀가 말끝에 이렇게 읊조렸다.

 

"어쨌든 한국은 필리핀보단 낫지, 필리핀... 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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