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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무르익으며 떠나는 가을

by 비르케 2018.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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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열매들이 잘 여물 수 있도록, 그 속에 단맛이 잘 배일 수 있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달라고 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 한 소절이, 가을이 가는 이 시점마다 자꾸만 생각이 난다. 가을은 곡식들을 무르익게 하고 한 해 정성 들였던 작물의 수확을 제공한다.  

 

 

나의 가을은 떫은 감 한 상자로 남는다. 벌써 몇 해째 가을마다 감을 한 상자씩 산다. 아는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반은 모험으로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구입하지만, 한 번도 맛없게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올해 감은 더 특별하다. 보기엔 참 맛없어 보이지만, 상상 외로 단맛이 강하다. 꼭 빨간 홍시가 되지 않아도, 일단 말랑말랑한 상태만 되어도 떫은 기 하나 없이 달다. 전에 샀던 감들은 일시에 익는 바람에 얼른 해치워야 한다는 강박마저 생겼지만, 이번 감은 좀 말랑한 상태에서도 그냥 먹을 수 있으니 더 편안한 맘으로, 먹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까먹게 된다. 

 

마치 마지막 잎새처럼, 한 박스의 감을 다 먹고 나면 그제서야 가을을 놓아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굳이 놓아주지 않아도 겨울이란 녀석이 이미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낀다. 가을이 갈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착잡해짐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감이 무 개 남짓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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