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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즐거운 WG의 추억, 함께 부르던 Schaurig Traurig

by 비르케 2019.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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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라 불리던,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있던 시간들을 20대의 나는 독일에서 보냈다. '세기말'이란 단어가 주는 막연한 두려움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야말로 '명탐정 코난'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단어와 함께, 마음마저 '도끼도끼(ときどき)'한.. ) 그때는 그리 두렵기까지 하던 그 단어가 이제와 돌이켜 보면 오히려 예전 추억이 듬뿍 담긴 따뜻한 느낌으로까지 다가오곤 한다.  

 

첫 번째 독일행에 관한 이야기들은 앞서 동일 카테고리 안에 포스팅 한 바 있다. 지극히 개인사적인, 정리 차원에서 한 포스팅이기도 하고, 너무 오래 전 일이기도 해서 일부러 찾아볼 만큼 특별한 에피소드들은 아니다.

 

두 번째 독일행은 시작부터 내게 '행운'처럼 비춰졌다. 거기가 어디라고, 처음 도착한 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가 하면, 방도 그런대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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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지 사흘만에 그럭저럭 편하게 방을 얻었지만, 그곳에서 한 학기를 지낸 후 방을 다시 구해야 했다. 주로 인근 대학생들에게 세를 주는 집이었기에 부엌도 따로 없고 화장실도 남녀가 공동으로 하나를 사용하고 있어 불편함이 많았다. 주인 할머니였던 프라우 프리스는 참 좋은 분이었지만, 끼니를 부실하게 먹고 있었으니 부엌을 쓸 수 있는 거처를 찾는 일이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얻게 된 방이 독일 대학생 셋과 함께 사는 WG(Wohngemeinschaft)였다. 알파벳 두 글자 그대로, '베게'로 읽으면 되는데, 쉽게 말하자면 셰어하우스 개념이다. 독일에서는 WG에 들어가려면,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다른 학생들의 맘에 먼저 들어야만 한다. 주인이 직접 임차인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주인을 만난 다음, 함께 살 친구들과 면담 비슷한 걸 거친 후 그들의 오케이 연락이 오고야 입주를 할 수 있게 된다. 나 또한 그런 절차를 거쳐 입주한 집에서 아스트리드, 이본, 산드라, 이 세 친구를 만났다.

 

WG에 살면서 진정한 독일 생활을 처음 해보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많았다. 그전에 방만 얻어 살던 때는 학교 갈 때 빼고는 내 방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었지만, WG에 있다 보면 음식도 해먹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나 혼자만의 생활이 아니다. 하루이틀 살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친구들에게 가끔씩은 한국 음식 맛도 보여주면서 음식 냄새를 피워야 했다. 설거지를 하려는데 크대에 누군가의 설거지가 보이면 내가 마저 하든지, 아니면 세 명 중 누구의 설거지인지를 일일이 물어 그들이 직접 하게도 해야 하는 게 WG다. 청소도 돌아가며 순번대로 해야 했다. 또 공과금 계산도 함께 하고, 전화나 텔레비전 약정도 함께 결정해야 한다.

 

본게마인샤프트(Wohngemeinschaft)란 말 자체가 Wohn-(거주하다)+Gemeinschaft(공동체)의 복합어다. 사회시간에 배운 대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가족, 이웃 등 공동체)는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이익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셰어하우스지만,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나의 WG 친구들은 순탄하고 모가 나지 않아서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이본과 산드라는 주말이나 방학마다 고향에 가곤 했지만, 아스트리드는 고향에 가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라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아 특히 더 친해졌다.  

 

그녀는 독일그룹 '디 프린첸(Die Prinzen)'의 '디 봄베(Die Bombe: '폭탄'이란 뜻)'라는 앨범을 카세트테이프로 갖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그 앨범 속 노래들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기도 했고, 그 중에 유독 템포가 느렸던 'Schaurig Traurig' 정도는 나도 따라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내 생일에 학교 친구들까지 부른 자리에서 아스트리드와 그 노래를 함께 부른 적도 있다. 

 

그러니 '디 프린첸'의 'Schaurig Traurig'가 내게 각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래 가사의 내용은 사랑에 관한 주제라 친구나 우정과는 전혀 연관도 없는 노래지만, 그 노래를 들을 때면 늘 아스트리드와 WG 친구들이 생각나곤 한다.

 

커피는 식어버렸고 초콜릿도 (집어먹다보니) 다 떨어진 상황.. 뭘 할지도 모르겠고, 레코드판은 이미 수천번 돌렸고(계속 음악만 들었음), 밖에는 비까지 내린다. 마음은 착잡해서 슬프기 그지없는데, 그냥 슬픈 것도 아니고 소름 끼칠 만큼(schaurig) 슬프다(traurig). 텔레비전은 틀어져 있건만 어수선하기만 하고, 그녀에게 편지를 써볼까 하다가 찢어버리고... '일단 와봐, 내가 다 설명할게'라며 애원하고 싶어도 전화는 울리지도 않고 마음만 미칠 것 같다. 작은 표현이라도, 아주 작은 시그널이라도, 딱 한 마디 말이라도, 웃음 한 줄기라도 간절하기만 하다... 가사는 대체로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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