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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타임리프

by 비르케 2019.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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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눈이 부시게' 공식 홈페이지 캡처)

 

우연찮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게 된 후, 그 드라마만의 타임리프에 한참을 몰입했다. 다른 드라마에서의 타임리프는 그저 남녀가 바뀌거나, 한 인물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식의 전개를 보였다면, '눈이 부시게'에서의 타임리프는 스물여섯 살 혜자가 할머니가 되어 겪게 되는 좌절과 노년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나 초반부터 관심을 끌었다.

 

건강을 위해 챙겨먹어야 할 밥이기도 하지만, 한움큼씩 삼켜야 하는 노년의 각종 약들을 먹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꼭꼭 챙기게 되는 끼니들, 어제는 할 수 있던 일을 오늘은 하지 못 하고 먼 눈길로만 바라봐야 하는 수많은 일상들을 참 가슴 아프게 그려냈다.

 

어린 시절 어느 해변에서 주운 시계로 타임리프를 할 수 있게 된 혜자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둘 운명 앞에 놓인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타임리프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찰나의 차이로 아버지를 잃게 된다. 다시 일어나 정신 번쩍 차리고 아버지가 당하게 될 운명 앞에 끼어들기를 감행하지만 또 좌절, 다시 시도하고 다시 좌절.. 이를 수차례 반복하는 동안 혜자가 가진 현재의 시간은 점점 소진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는 연인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아픔까지 더해지니, 어서 스물다섯의 혜자로 다시 돌아가 준하와의 사랑을 꽃 피우기를 보는 내내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2일 방영분에서는 뜬금없는 전개가 머릿속을 어지럽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알츠하이머를 앓는 혜자의 고장난 머리에서 나온 허상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 아직 2회 분량이 더 남아 있다. 그렇지만, '알츠하이머'란 현실 앞에 이제까지의 타임리프 극들이 보여주던 정형화된 틀에서 관객이 튕겨져 나가는, 그런 느낌마저 든다. 스물다섯 꽃다운 주인공으로 당연히 다시 돌아오리란 기대를 갖도록 울며 웃는 단짠의 매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다가, 긴장 풀린 관객에게 여지없이 찬물 세례를 퍼부었다. 놀랍게도, 관객을 제대로 가지고 놀 줄 아는 드라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시계를 과거로 돌려 아버지를 살려냈지만 자신의 젊음을 담보하고 만 혜자... 그녀가 말한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서라면, 그녀가 젊음을 바친 만큼 아버지도 건강해야 하고 가족들도 행복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리 하나를 잃었고 엄마와의 이혼을 앞두고 있다. 죽지만 않았을 뿐, 그다지 더 낫다고 자신할 수 없는 삶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다 혜자의 허상이라니, 아버지였던 사람은 사실 아들이었고, 엄마는 며느리, 오빠는 손자... 졸지에 관객들은 똑똑하지 않고서는 이해가 안 되는, 아니 똑똑해도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빠진 채, 혜자의 공상에서 빚어진 관계들을 재정립하느라 혼돈스럽다.

 

그 속에서 원래 젊고 싱싱하던 스물다섯의 주인공이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었을 때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던 할머니가 그려낸 스물다섯의 허상이 본질적으로 아주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이 아닐 것 같다.

 

'혜자'란 이름을 들었을 때, '요새 그런 이름 가진 20대가 얼마나 될 거라고..' 했었는데, 역시나 다음주 남아 있는 두 편에서도 젊은 혜자를 기대하긴 쉽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든다. 늙은 혜자가 말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한번씩은 부여되는 '옵션' 같은 게 젊음이라서, 늙은 혜자에게도 스물다섯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아닌 머나먼 기억 내지는 허상이기에, 혜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물 다섯은 더한 아쉬움으로 남게 될 것 같다.

 

'혜자'란 이름은 드라마 관계자들이 이미 연기자 '김혜자'씨를 섭외할 작정으로 처음부터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름부터서가 참 정겹다. 그가 연기해서일까, 스물다섯의 혜자가 갑자기 늙어버린 채 그대로 머무는 것 보다, 어쩌면 수많은 세월을 다 이겨내고 그 속에서 좋았던 시절을 허상으로나마 기억하는 늙은 혜자가 오히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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