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읽는 중이다. 아직 다 읽은 게 아니다. 그런데 프레드릭 배크만, 이 사람 왜 이렇게 웃긴지, 그의 소설 '불안한 사람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 번씩 실소를 터트리게 된다. 특히나 엄마들의 대사, 악담인 듯 으름장인 듯 세상 달관한 듯 시크하다.
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이 그려내는 부모
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장편소설
다산책방
이은선 옮김
이 책에는 39세의 은행강도가 등장한다. 그의 행적은 소설 초반 한참 바보 같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강도짓을 하기 위해 권총을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곳은 하필 캐시리스 은행이다. 은행에 현금이 없는데 거기다 대고 6,500 크로나를 달라고 한들 돈이 나올 리 없었다. 은행강도가 제시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애매한 금액, 게다가 은행강도치고는 많지도 않은 돈을 요구하는데 그 금액이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6,500 크로나는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을 얻기 위한 돈이었다. 멋모르고 투자한 돈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서 오히려 부채만 남게 된 그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이었다. 그러니 바보처럼 보이는 그는 사실 바보가 아니라 넋이 나간 상태다. 다시 말해 멘탈이 붕괴된 상태인 것이다.
P.17
39세의 은행 강도는 도망쳤지만 구체적인 도주 계획이 없었고, 도주계획의 핵심은 뭐였냐 하면, 오래전에 은행강도가 부엌에서 얼음과 레몬 조각을 챙기는 걸 깜박해서 다시 달려갈 때마다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과 같다. "머리가 달리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머리가 달리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뭔가를 깜박하고 다시 돌아온 자기 자식에게 상당히 시크한 말을 던진 엄마. 은행강도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본인이 얼떨결에 저지른 일에 대해 몸으로 때우기 위해 달린다.
최소한 경찰이 추적하니 도망은 가야 할 건데, 다짜고짜 바로 앞에 열려 있던 문을 향해 돌진하게 되었고, 그곳은 하필 부동산 업자가 집을 구매할 사람들을 데리고 온 오픈하우스 현장이었다.
은행을 털지도 못한 은행강도는 경찰에 쫓기는 것도 모자라, 손에 여전히 총을 든 채다. 그러니 비명소리가 안 들릴 리 없다. 결국 그는 본의 아니게 강도가 되고야 만다. 그로부터 인질들은 모두 풀려났으나 은행강도는 종적을 감췄고, 카페트에는 피가 흥건하다.
젊은 경관 야크는 인질들이 있던 현장을 방문하고, 인질들을 한 명씩 불러 참고인 조사를 한다. 그런데 참고인들이 노답이다. 제멋대로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P.26
경관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정을 응시한다. 그의 어머니는 귀찮아서 장래희망을 바꾸지 못한 아이들이 경찰이 되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자아이들은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으면 누구나 "경찰요!"라고 대답하는 시기를 거치지만 대부분 나이를 먹으면 더 나은 꿈을 찾는다. 그는 자기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답답해 하는 야크의 곁에 귀찮게 따라붙는 또 다른 한 명. 나이 많은 경관 짐이다. 그는 사실 야크의 아버지다. 즉 야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것이다.
야크의 어머니가 말했다. 장래희망을 바꾸지 못한 아이들이 경찰이 된다고. 어릴 적 남자아이들의 꿈이 경찰인 경우가 많지만, 세월이 가면 꿈도 바뀌기 마련인데 귀찮아 바꾸지 않았다나. 생각해보니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야크의 어머니는 야크의 직업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아버지 쪽에서 야크가 자신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야크의 주변에서 아들을 최대한 돕고 싶다.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차가운 태도를 보일 때도 아버지는 아들 곁을 서성이며 노심초사다.
P.58
딸이 십 대였을 때 아이들이란 연과 같다고 생각한 짐이 줄을 최대한 단단히 붙잡아봤지만 딸은 결국 바람에 실려갔다. 줄을 끊고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갔다.
아버지 짐에게는 야크 말고도 자식이 한 명 더 있다. 딸은 약물에 절어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한 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짐의 마음속에는 하늘로 날아가버린 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야크가 늘 자신의 곁에 있으니 좋겠지만, 사실 야크 입장에서 경찰이 된 이유는 아버지와 그다지 상관이 없어 보인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필체는 말재간을 부리듯 재미있다. 때로는 너무 수다스러워 책을 잠시 덮게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중간중간 독자들을 향해서도 한 마디씩 거든다.
이제까지 나온 등장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다리 위에 있었다는 것만 떠올리라고 한다. "왜?" 이런 거 하지 말란다.
10년 전 야크가 경관이 되기 전, 다리 위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제발 뛰어내리지 말라고 말을 걸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생각났던 것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야크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는 한때 상당히 잘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모은 돈을 어느 부동산업체에 투자한 것이 화근이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부동산 개발업체에 투자한 것이 안전한 투자라고 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버렸다. 자신의 아이들과 행복한 꿈을 실현하고 싶었던 다리 위의 남자는 그날 어린 야크의 눈앞에서 기어코 물에 뛰어들고야 만다.
(뉴욕의 어느 은행이 파산한 것을 필두로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2008년 글로벌 위기를 가져온 리먼사태를 말하는 것 같다.)
p.82
"엄마한테 화내지 마. 소리 지르지 마.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아인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진 몰라도 지난 한 달 동안 날마다 방과 후에 크리스마스 특별판 잡지를 팔아서 크리스마스 음식을 장만할 수 있게 어머니에게 돈을 드린 것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나한테 왜 그 돈을 줬니" 그것이 그녀로서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사과에 가까웠다.
10년이 지난 시점, 다리 위의 남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야크가 은행강도를 쫓고 있다. 6,500 크로나를 위해 은행강도를 자초한 39살의 범인, 그에게도 가족은 각별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아이들을 품에 품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은행강도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오래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어머니에게 줬다가 어머니를 파산에 이르게 한 적이 있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다. 자식이 준 돈을 투자했던 그의 어머니는 결국 모든 걸 잃게 되었고, 이듬해 2월 가족들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은행강도는 그때 생각했었다. 자신은 결코 아이를 낳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를 낳게 되자, 이번에는 절대 대책 없는 부모는 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나 이혼으로 아이들을 뺏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우연히 이웃의 총을 발견하게 되었고, 장난감일 거라 생각하며 은행을 향했고, 총은 장난감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은행은 캐시리스 은행이었던 것이다. 모든 상황은 그렇게 꼬여, 자신 없던 그를 은행강도로 만들었다.
이제 쫓기는 신세가 된 은행강도, 나름 반전이라면 강도가 여자였다는 점. 아이들을 남편에게서 데려오려면 월세를 지불할 능력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임시직장을 겨우 구한 그녀에게 돈을 빌려줄 은행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착하지만 나쁜 짓을 시작한 범인'의 이야기로 전개되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불안한 사람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엽고 예쁜 자식들과 더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부모들의 자그마한 소망이 부서지는 그 느낌을 가슴 아리게 바라보게 한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자아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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