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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 인간미 넘치는 소설 - 미셸 깽

by 비르케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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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프랑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를 숨긴 채 요직에 몸담으며 안온한 삶을 살았던 89세 노인, 모리스 파퐁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미셸 갱의 '처절한 정원'은 역사적인 그 현장을 찾은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처절한 정원 , 인간미 넘치는 소설 - 미셸 깽

 

 

책머리에 아폴리네르의 시집, <칼리그람>에 등장하는 구절이 써져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처절한 정원'이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연유했음을 알게 해 준다. 이 시를 알면 제목과의 연관성을 더 잘 알 것 같은데, 해설에도 별다른 언급이 없어 아쉬운 부분이다.

 

 

 

 

※ 작품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 :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

 

제2차 세계대전중 프랑스 친독 정부, 비시 정권하에 치안 부책임자로 있으면서, 1,590명의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일을 담당했던 실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자신의 추악한 과거에 레지스탕스 이력을 덧칠해, 전후에도 고위직을 역임하며 편안한 삶을 살았으나 뒤늦게 어느 역사학자로 인해 그의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결국 끈질긴 항소에도 불구하고 89세 고령에 징역 10년형을 확정받았으나 형을 다 치르지 못하고 96세에 생을 마감했다.

 

 

 

처절한 정원, 대강의 줄거리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있던 날, 그 자리에 어릿광대 피에로 복장을 하고 나타났던 '나(작중화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릴 적에 어릿광대를 몹시도 싫어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어릿광대인 자신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교사'라는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학대하듯 무대 위에서 피에로 역을 맡아 온갖 우스꽝스러운 짓을 연출하던 아버지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아버지의 숨겨진 사연은 어느 날 삼촌 가스똥에 의해 밝혀진다. 그날은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그리고 가스똥 삼촌 내외와 함께 '다리'라는 이름의 독일 영화를 보러 갔던 날이었다. '다리'는 아버지와 삼촌에게 각별한 영화였다. 

 

 

 

 

아버지 앙드레와 가스똥 삼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두에역에 있는 변압기를 폭파시키는 임무를 맡았었다. 두 사람은 그 변압기를 왜 폭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폭파한다. 그리고 폭음을 들으며 임무 성공에 들떠 기뻐하는데... 결국 독일군에게 붙잡히고야 만다.

 

죽었구나 생각하던 것도 잠시, 독일군이 범인을 특정해 체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앙드레와 가스똥 이외에도, 독일군이 잡아온 총 4명의 용의자 중에 누가 됐든 한 명의 범인을 골라 상부에 보고하고 사건을 종료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너네들끼리 이야기해서 사건을 책임지고 죽을 놈 한 명만 정해, 다 죽는 건 너무 어리석잖아!'

이렇게 말하는 듯한 독일군의 말에, 결국 제비뽑기까지 생각해내는 네 사람... (예전 어느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도 겹쳤다. 아이들을 데려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두 아이 중 한 명만 데려가라고 선택을 강요했던 영화가 있었다. )

 

 

독일군 베른의 충고

 

그때 그들 인질들을 지키며 통역을 맡고 있던 어느 독일군이 프랑스어로 그들에게, 적의 계략에 말려들지 말 것을 충고한다. 한 명의 희생양을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질 반인륜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곧 죽게 생긴 사람들 앞에서 너무도 방관자적인 말이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모두는 숙연해지고 만다.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난다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독일군 보초 겸 통역관, 베른

 

보초 겸 통역관이었던 그 독일군은 자신을 "어릿광대 베른(베르나르 비키)"이라고 소개한다. 훗날 아버지, 삼촌과 함께 보게 되는 그 '다리'라는 영화를 만들게 되는 장본인이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두 명의 다른 남자들이 흙구덩이에 있을 때, 어디선가 베른이 나타나 자신이 보초를 맡은 인질들과 서서히 친해져 가던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참 인간미 넘치고 감동적이었다. 

 

 

총알을 쓰기도 아까운 듯 구덩이에 몰아넣어진 인질들 앞에 등장한, 미련한듯 보이는 보초병

 

죽을 위험에 처한 인질들을 위한 혼자만의 공연

 

구덩이에 떨어져버린 샌드위치 여섯개

 

독일군 베른은 자신의 몫인 양식을, 마치 실수인양 떨어뜨려 인질들에게 몽땅 바쳐버린다. '처절한 정원',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베른과 같은 개성 강한 인물들 때문이다. 적이기 이전에 인간인 것이다. 오히려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은 니콜의 전남편이나 이를 설득한 니콜이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화든 책이든, 선과 악의 구분을 너무 명확하게 그어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작품들이 너무 많다. 특히나 대중의 구미에 맞게 버무려진 작품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다. 실제 인간 세상은 그런 단순 구조에 의해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배제한 작품들은, 선만 있고 색이 없는 듯 느껴진다.

 

 

 

 

'처절한 정원' 서두

 

제2차 세계대전 죽음의 그늘을 드리운 원수의 나라 독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역사의 흑백논리에 대해 어리석은 짓이라 말하며, 독일어를 배우게 했다. 그리고 훗날 '나'의 누나는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전 세계를 둘러봐도 서로 이웃하고 있는 나라끼리의 묵은 갈등은 나라마다 골이 깊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것이기보다 미래에 그런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에 더 비중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처절한 정원'의 미셸 깽 또한 이 작품을 통해 그런 흑백논리를 배제하고 가장 인간적인 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 같다. 적이었던 독일인 베른이 그랬듯, 아버지도 전쟁 이후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을 위해 어릿광대를 자처한 것으로 해석된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어릿광대 일은 그에게 숙명이었을 것이다. 작고 가벼운 책이지만, 읽는 동안 따뜻한 인간미에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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