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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간의 계곡' vs '남아 있는 나날'

비르케 2025. 5. 26. 00:30
겨울이 남기고 간 황폐함 속에서 피어난 초록 새싹을 보면 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투병을 마치고 마침내 고른 숨결을 내뱉듯 대지에 색채가 돌아왔다. 바람이 한 점씩 불어올 때마다 황금빛 꽃잎, 푸른 잎사귀가 열광하며 언덕을 깨웠다. 

소설 '시간의 계곡' vs '남아 있는 나날'

Valley of the Time Tombs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 다산책방 / 2025년 1월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데뷔작 '시간의 계곡(Scott Alexander Howard)'은 고립된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20년 미래의 동일한 마을이, 서쪽으로는 20년 과거의 동일한 마을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마을들은 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하게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이야기는 16세 소녀 오딜 오잔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장차 마을의 최고 의결기구인 콩세이유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콩세이유는 주민들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다른 계곡으로 이동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조직이다. 

 

어느 날 오딜은 미래에서 온 방문객 두 명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그녀의 친구 에드메의 부모였다. 그들이 미래에서 자신의 아들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딜은 에드메가 곧 죽을 운명임을 감지한다.

 

오딜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인 에드메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 그러나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그녀로서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콩세이유에 의해 비밀을 함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과의 비교

'시간의 계곡'을 읽으면서 '시간'을 배경으로 한 다른 책들 중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떠올렸다. 아마도 조 하킨이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이 작품을 향해, '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와 나란히 놓일 놀라운 데뷔작'이라는 평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계곡'은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요소를 바탕으로, 운명에 대한 체념과 자유의지, 사랑과 책임감, 윤리적 딜레마 같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오딜의 갈등 상황을 지켜보며, 독자는 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그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될 것이다.

 

'시간의 계곡'에서 오딜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면서도 질서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며 충실한 삶을 살았고, 그 결과 사랑을 놓아버리고 만다.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 등장하는 주인공 스티븐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충직한 집사로서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직업적 의무에만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 결과 일생에 딱 한 번 찾아왔던 사랑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더 이상 한 주인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야만 했던 집사 따위는 사라지고 없다. 결국 이제서야 지난날의 자취를 되밟지만, 시간은 그를 남겨둔 채로 저 멀리로 달음박질치고 난 뒤다. 

 

소설에 등장하는 두 인물 모두 갈등 끝에 스스로 옳은 일이라 생각되는 일을 선택했지만, 그 결과는 개인적인 상실로 돌아왔다. 오딜은 '알고도 바꿀 수 없는 미래', 스티븐스는 '알았더라면 바꿨을 과거'와 마주한다. 시간의 방향은 미래와 과거로 정반대지만, 두 사람 모두 시간을 넘지 못한 인간의 한계에 직면했다. 

 

 

정리

시간을 테마로 한 작품들은 생각보다 많다. '시간의 계곡'은 미래를 알게 된 순간 윤리적 갈등과 직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남아 있는 나날'과 같은 책들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와 선택을 감내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둘 다 시간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추고 있어서 두 소설을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는 일이 즐겁기도 했다.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삶을 바꾸려고 할 것 같지만 그것이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은 결국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과거의 시간들에 대한 후회와 회한도 현재와 연결된다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현재란 그 어떤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