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행열차가 탈선해 낭떠러지로 내리 꽂히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열차에 탔던 승객 중 절반 가량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이 되었다. 죽은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 무라세 다케시의 소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 원제 : 니시유이가하마 역의 신(西由比ケ浜驛の神樣)
- 작가 : 무라세 다케시
- 장르 : 판타지
- 초판 1쇄 발행일 : 2022.05.11
사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몰려든다. 가마쿠라선 급행열차에 탔다가 사망한 이들의 주검을 마주한 사람들 중에는 결혼식 날짜를 받아두고 행복한 신혼의 단꿈을 꾸던 한 여자가 있다.
그리고 삶에 찌든 아버지를 외면했던 아들이 있다. 오랫동안 홀로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이제 막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꿈에 부풀어 있던 남학생도 있다. 그리고 남편으로 인해 순식간에 범죄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버린 기관사의 아내도 있다.
소설 < 세상의 모든 기차역 >은 이렇게 네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태로 묶여 있다. 각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은 서로 다르지만, 각자 유령열차에 올라 예비신랑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좋아했던 소녀를 만나고, 열차의 운전을 담당했던 자신의 남편을 만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한다.
그러면서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중간중간 서로 교차하기도 한다. 당연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열차를 탔던 사람들이니까.

"사고가 나서 국도는 못 타니까 돌아서 가겠습니다."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기사가 하는 말에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니시유이가하마 역 일대는 몰려나온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탈선 사고가 일어나자, 운행하던 가마쿠라선의 모든 열차가 멈췄다. 왱왱대는 구급차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던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화면에 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주요 뉴스는 죄다 가마쿠라선 상행 열차 탈선 사고에 관한 기사였다.
책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차 사고가 나고, 병원을 향한 택시에 타고 있는 한 여자.. 이야기의 초반부터 강렬한 몰입이 시작된다.
그녀는 예비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구급차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병원에 도착해 사랑하는 이의 주검과 마주하고야 마는 그녀.
그렇게 예비신랑을 보내고 두 달 뒤,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사건이었던 만큼 사람들의 큰 관심 속에, 열차와 관련된 이상한 이야기들이 나돈다. 사고 이후 운행이 정지된 가마쿠라 선 철도에 밤이면 열차가 지난다는 것.
그 유령 열차에 오르면 이내 타임리프에 빠진다. 다만 죽은 이가 탄 곳에서 열차를 탈 수 있고, 사고가 났던 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다른 역에서 꼭 내려야 죽음을 피할 수 있다. 죽은 이들을 만나는 데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 것이다.
역에서 만난 어느 유령이 알려주는 대로, 이미 죽음이 기정사실이 된 사람에게 '앞으로 당신은 죽게 될 것'이라고 알려서도 안 되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그와 함께 내리려고 해서도 안된다.

개인적으로 네 개의 에피소드들 중에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두 번째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이다. 큰 꿈을 품고 입사했지만 매사 실수투성이에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사회생활에도 서툴다.
계속되는 스트레스때문에 홀로 어두운 버스승강장에서 맥주를 홀짝인다. 자신의 힘듦을 모르는 것 같은 부모,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사는 아버지가 특히나 원망스럽고 외면하고만 싶다.
결국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 하루, 이틀, 사흘... 회사를 인생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그.

그렇게나 염원하던 꿈의 직장을 몇 달 만에 그만두었는데, 쉽게만 여겼던 알바도 그에게는 쉽지 않다. 결국 그는 빈털터리로 전락해 간다. (대기업 신입 몇 달에 회사를 때려치워버리다니... 아깝다... 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시점이라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책 속에 빠져든다.)
몰려든 사람들은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 빵을 고르느라 혈안이 되었다. 내 옆에 있던 노인과 거의 동시에 두툼한 돈가스 샌드위치를 집었지만, 내가 힘으로 빼앗았다. 그걸 집을 때만큼은 수치심이고 자존심이고 없었다.
삶의 바닥을 향해 내달리던 그때, 아버지의 부음이 들려온다. 바쁠 때는 돌아보지 못했던 아버지, 험한 작업에 찌들어 있던 아버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아버지는 성실하고 솜씨 좋고 포기를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다가가 사죄하며 회한 가득한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의 자취를 따라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그의 모습이, 네 가지 에피소드 중에 가장 희망적인 결말을 암시했다.
네 가지 이야기 모두 순식간에 읽었다. 물론 어떤 부분은 상투적이고 밋밋하기도 했지만, 화사한 책 표지만큼이나 아름다운 인연에 대해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삶의 마지막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알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을 위해 못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된다. 마지막 인사, 화해, 고백...
현실은 소설에서처럼 "다시 한번"이 없기에 언제든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 같지만... 그게 맘먹는다고 잘 되지는 않으니.
죽은 사람과 재회해 마지막 작별을 하는 소설이나 영화들이 꽤 많다. 그만큼 영원한 작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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