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문학의 거장이자 인간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그려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간의 내면적 불안과 관찰자로서 그려내는 유려한 서술로 유명하다. 이미 100쯤 전에 나온 중단편 소설들인데도 볼수록 새롭고 세월이 무색할 만큼 공감이 간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모음집 < 보이지 않는 소장품 >
슈테판 츠바이크 대표 소설집 - 보이지 않는 소장품
출판사: 이화북스
초판 1쇄 펴낸 날: 2022.01.10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1942)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태생 작가로, 오스트리아 또한 독일어 권역이기에 그의 작품도 독일문학에 속한다. 그는 부유한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1900년대 들어서는 이미 유명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그가 살았던 당시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닥쳤던 불운한 시대로,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 세력을 피해 영국에 정착했지만, 독일군이 점점 서유럽을 장악해 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망명, 이듬해에는 브라질로 망명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정복하려 세력을 확장해 오는 독일군의 기세에 압도되어 쉼 없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다가 1942년 결국은 아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모음집 - 보이지 않는 소장품
이책은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다. 오래전 작가이니 만큼 이번 책도 새로운 책이 아니라 이미 번역이 된 바 있는 여섯 개의 작품들을 새로 모아 이화북스에서 출간했다. 책의 제목 < 보이지 않는 소장품 >은 여기에 묶인 6개의 중단편들 중 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여섯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아찔한 비밀 (Brennendes Geheimnis)
- 불안 (Angst)
-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Die Legende der dritten Taube)
- 모르는 여인의 편지(Briefe einer Unbekannten)
- 보이지 않는 소장품 (Die unsichtbare Sammlung)
- 어느 여인의 24시간 (Vierundzwanzig Stunden aus dem Leben einer Frau)
아찔한 비밀 (Brennendes Geheimnis)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 여섯 개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은 < 아찔한 비밀 (Brennendes Geheimnis) >이었다. 원제인 'Brennendes Geheimnis' 는 영어로는 'burning secret', 즉 '불타는 비밀'이라는 뜻이다.
휴가를 맞아 젬머링을 찾은 어느 젊은 남작, 여기저기 둘러보지만 심드렁하다. 하지만 이내 사냥감을 발견한다. 아픈 아들 휴양차 젬머링에 온 여인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떻게 작업을 시작하나 궁리 끝에 남작은 그녀의 아들을 이용하기로 한다. 아들에게 호감을 산 다음 서서히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이 아들, 자신에게도 어른친구가 생겼다며 무척 자랑스러워하다가 어느 순간 남작과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무언가 비밀을 갖게 된 것만 같아 너무도 화가 난다. 남작이 자신을 친구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어쩐지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하면 안 될 것만 같고, 어른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자니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이인데 결국 올 게 왔다.
존경하던 두 사람에 대한 배신으로 슬픔에 사무치는 아이... 이 부분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며칠동안 분노와 초조함, 속상함과 호기심, 무력감과 배신의 상처에 맞서 어린아이답게 싸우기도 하고, 자신이 어른이라는 망상에 빠져 그런 감정들을 억눌러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가슴에서 터져 나와 눈물로 쏟아졌다. 아이로서 우는 건 이번이 마지막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히 울었다... 아이는 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순간에 울음으로 모든 것을 토해냈다. 신뢰, 사랑, 믿음, 존경, 한마디로 자신의 유년기 전체를 토해냈다.
제목에서 '아찔한 비밀'이라 함은, 소년의 입장에서 엄마와 남작이 뭔가 둘이서만 어떤 일을 벌이고 있음을 막연히 느끼게 되면서 그 뒤를 캐기 위해 나름 추리를 하고 미행을 하고 엿듣는 과정에서 드러난 진실이다.
물론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은 소년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그저 막연하기만 하다. 마치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행동이 그러했듯이.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가 헛물을 켜는 일은 없을 듯했다... 미모가 기우는 해처럼 찬란히 불타오르고, 어머니 대접을 받을지 여자 대접을 받을지를 두고 선택을 해야 할 마지막 기회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그런 시기였다... 이때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살지, 아니면 아이의 운명을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일에 그 누구보다 예리한 촉수를 가진 남작은 그녀가 삶을 불꽃처럼 불사를지 희생할지를 두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했다.
휴가지에서 재미 좀 보려고 접근한 남작에게는 단순한 사랑놀이에 불과한데, 소년의 엄마는 그에게 흔들린다. 여자들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접어들면 자신이 어머니 대접을 받을지 여자로서 대접을 받을지를 결정할 마지막 기회 앞에 아슬아슬하게 서게 된다... 비유가 확 와닿는다. 기울기 전에 불타는 태양처럼, 소년의 엄마는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불사르고 싶었을 것이다. 아들만 없었더라면ㅎㅎ... 그러니 아들을 떼놓고자 한다.
"그래, 여기서 기다리렴." 잠시 주저하며 무언가 찾는 듯 보이던 그녀는 마침내 무엇을 결정한 듯,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에드거는 엄마의 지시대로 홀에서 기다리는 대신, 정문뿐 아니라 다른 문들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거리에서 망을 보기로 했다. 어쩐지 사기극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이를 따돌리기 위한 두 어른의 어설픈 거짓말과 그 거짓말에 당황하고 절망하는 소년, 그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추격전, 거짓말쟁이 어른들로 인해 더 빨리 유년기를 지나 성숙해져 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던 작품이었다.
< 아찔한 비밀> 외에 다른 작품들도 재미있게 읽었다.
불안 (Angst)은 변호사의 아내로 안정된 부르주아의 세계에 살면서, 꼭 좋아한다고도 할 수도 없는 가난한 피아니스트 애인의 남루한 숙소를 오가는 귀부인의 이야기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보던 그 시절 레퍼토리, 귀부인과 예술가의 사랑이야기라는 테마가 맥없게 느껴지는 작품. 부유한 귀부인이 약점을 잡혀 불안에 떨게 되는 과정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보이지 않는 소장품 (Die unsichtbare Sammlung)은 오랜 세월 자신의 가게에서 골동품을 구매해 온 고객을 찾아 그의 소장품 중 일부를 재매입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객의 집을 방문했던 골동품 수집가가 고객의 집에서 보고 듣게 되는 사연을 담고 있다.
골동품을 구매했던 사람은 부자라서 그것들을 수집해 모은 게 아니었다. 그는 허리띠를 졸라매가며 아끼고 아껴 골동품들을 구매했을 뿐 현재는 형편이 좋지도 못하고 최근 들어 시력까지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와 안드레아 만테냐, 렘브란트 작품들이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 오래된 작품들을 소장해 왔다. 그런데 그 소장품들에 문제가 생겼다.
눈먼 노인이 가족들에게 나중에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소장품들을 지금 기준으로 '인플레이션 헷지' 수단으로 모았던 것 같다. 실제로 제목 아래 '독일에서 인플레이션이 한창이던 시절 이야기'라는 부연설명이 있다. 지금도 비슷한 개념으로 금에 열광하지만, 지금과 그때의 독일은 사실 비교가 안 된다. 과장해 표현하자면, 마르크로 불 때던 시절 이야기니까.
나치 집권기. 유대인으로서 느끼는 불안감으로 인해 쫓기듯 이 나라 저 나라로 망명했으나, 세상을 잡아 삼킬 듯 밀려오는 나치의 기세에 눌려 차라리 눈 감아버린 불운한 작가. 사실 그 시절에 슈테판 츠바이크만이 아니라 유럽의 수많은 지식층이 망명길에 올랐으며, 망명 도중에 죽음을 맞기도 했고 그가 그랬듯이 조여 오는 불안감에 스스로 생을 놓기도 했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에서 말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독한 놈이 살아남는다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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