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아픈 부모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고 한 가정을 어깨에 떠메게 되는 일이기도 하며 어그러진 관계를 바로세워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힘들면서도 따뜻한 둘의 존재, 둘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책.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 사쿠라기 시노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원제: ふたりぐらし(둘이서 살기)
작가: 사쿠라기 시노(桜木紫乃)
1판 1쇄 발행: 2021년 1월 4일
- 일본 출간 2018
펴낸곳: 몽실북스
어머니 데루의 호출이 귀찮은 노부요시. 큰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매주 한 번씩 동네병원을 두고 큰 병원에 가려는 모친을 따라 전철을 타고 삿포로를 오간다.
간 김에 인근에서 점심으로 메밀국수를 먹곤 하는데, 이 날은 데루가 갑자기 장어집 앞에 선다. 자꾸 보면 먹고 싶어지니 그만 가자고 하는 노부요시. 아들의 말을 신호로 곧바로 포렴을 들추고 식당으로 들어서는 데루.
"나, 장어 살 돈 없는데."
상대가 어머니든 아내든 "나 돈 없어"하고 말할 만큼 자존심의 허들을 낮추는 데는 선수가 되었다.
노부요시는 영화관의 영사 기사로 일하고 있다. 대학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하던 그 일이 그대로 그의 직업이 되었다. 당시에도 그는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지 않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동네 영화관이 곧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일 영화를 볼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 다른 직업은 알아보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버렸다.
노부요시의 수입이 변변치 않아도 결혼생활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아내 사유미 덕분이다. 사유미는 간호사로 근무하며 실질적 가장으로 살고 있다. 남편이 언젠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노부요시가 행여 상처 입을까 오히려 그를 배려하고 존중하려 노력하는 그녀다.

"엄마 왜 그래?" 다정하게 물었다.
"왜 그러긴. TV 보다 널 깜박했지 뭐냐. 미안하구나."
데루는 느릿느릿 시선을 움직여 1월에 멈춰 있는 달력을 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라고 말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진지한 얼굴이다.
노부요시는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어머니를 보며, 결국 그날이 온 것인가 겁이 덜컥 났다. 자신도 아내에게 얹혀살고 있는데, 어머니 치매까지 더해진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 봐온 물건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작별인사를 건네는데 그 사이 데루는 아들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어집에서도 아들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여기가 어딘가 망연자실했던 어머니다. 한술 더 떠 어머니는 아들을 몰라보고 다른 누군가로 착각한 채 말을 건다. 사모님을 어디서 만났느냐고.
"동네 슈퍼에 갔는데, 어떤 여자가 슈퍼 입구에 앉아 벌레를 한 마리씩 잡아서 수풀에 던지고 있더군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여자가 일어섰을 때 뭘 한 거냐고 물었습니다. "
어머니가 정상은 아니구나 하면서도, 아내를 어디서 만났느냐는 그 말에 노부요시는 그의 인생에 얼마 없는 찬란했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 사유미가 놔준 벌레는 귀뚜라미들이었다. 내버려 두면 밟혀 죽을 벌레와, 그 벌레를 밟음으로써 죄책감과 불쾌함을 느껴야 했을 누군가를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정신이 나간 듯 아들을 몰라보고 맞장구를 치던 어머니가 금세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다. 진짜로 심각한 상태인 것인지 장난을 한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황.
어머니의 집을 나서면서 노부요시는 문득 자신도 아내에게 그 귀뚜라미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매주 아들을 호출해 병원에 가자고 했던 데루는 불현듯 죽음을 맞는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날은 아들을 부르지도 않고 119를 불렀다.
노부요시는 너무도 담담하게 또 너무도 조촐하게 혼자서만 어머니 데루의 장례를 치러버린다. 노부요시가 정말 못나 보이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버려진 집은 일 년이나 방치된다. 이웃에서 잡초 때문에 연락을 해 왔을 때서야 노부요시는 아내 사유미와 함께 어머니의 집이자 자신이 자라온 집을 찾는다. 그때까지 어머니의 집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하다니... 어머니가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모아둔 돈마저 발견하지 못한 채 건성건성 모든 것들을 쓸어내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상황이 아닌가.
데루의 죽음까지가 소설 속 10개의 이야기 중 첫 번째 장이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쓸쓸한 삶을 보내고 있는 노모의 편에서, 또 한편으로는 아직 아이도 없이 아내에게 기대 살고 있는 40대 아들 편에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첫 장을 읽으면서, 이 소설의 제목 <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의 '둘'이 노부요시와 데루 두 사람을 뜻하는 줄 알았다. 여기서의 '둘'은, 노부요시와 그의 아내 사유미 두 사람을 둘러싼 부부의 이야기이자, 일반적인 부부나 연인 등의 주제를 다룬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는 노인문제 관련된 주제들이 흥미로웠다. 특히나 치매를 대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매우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느 순간 꿈에서 깬 표정의 어머니가 "널 잊으면 어떡하니"하고 불안해하여 그녀는 서슴없이 "잊어도 돼"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오무다 유리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치매를 앓게 된 어머니가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나중에는 딸도 못 알아볼까 두려워했는데, 정작 자신은 어머니에게 "잊어도 돼."라고 말했노라고. 그리고 차라리 어머니를 남의 손에 맡기자고 결심한다. 그 편이 서로에게 덜 슬플 거라며.

문득 어머니 데루가 떠올랐다.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 되었구나. -아니, 왜 이제 와서.
유리의 어머니가 병동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 문득 노부요시는 자신의 어머니 데루를 떠올린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장어덮밥을 먹던 날, 치매였던 것인지 어머니는 잠시 타인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그리도 성가셨던 어머니가 막상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들 대신 119에 전화를 했었고, 자신은 어머니의 장례를 아주 간단히 치러버렸었다. 그것이 2년 전. 눈물 한 방울 똑.
울어서 오늘을 씻어낼 만큼 시간이 흘렀다.
이 구절도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사쿠라기 시노의 표현들 참 좋다.

노부요시와 사유미 두 사람은 데루의 집으로 들어와 살기로 한다. 두 사람이 살던 집에,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한 사람이 떠난 다음, 이제는 새로운 두 사람이 살게 되었다.
부모의 집을 재단장해 살며 두 사람에게는 가능성의 문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한다. 빠듯하게 돌아가던 삶에도 여유가 찾아들고, 어딘지 희망 한 점, 두 점,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 그들의 삶이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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