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뿐이었다. 예측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원제: Where the Crawdads Sing
작가: 델리아 오언스
번역: 김선형
초판1쇄 펴낸날: 2019년 6월 14일
P.13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이 책의 시작은 어느 습지의 풍경을 보듯 평화롭다. 그러나 습지에서도 삶과 죽음은 반복된다. 증명이나 하듯 프롤로그에는 한 남자의 주검이 등장한다.
때는 1969년,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청년 체이스 앤드루스가 습지 안에 있는 망루 아래서 죽은 채 발견된다. 망루에서 발을 헛디뎌 죽은 것처럼 보이나, 주변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날아서 망루에 오르지 않은 이상 그의 발자국이라도 있어야 했거늘.
그로부터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그 어두운 습지 어느 비좁고 누추한 판잣집을 배경으로 카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카야는 어린 시절 엄마가 집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녀는 엄마가 다시 돌아오기 힘든 먼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느낌으로 안다. 하지만 주정뱅이 아버지를 자극하게 될까 봐 차마 엄마를 소리쳐 부르지 못한다.
그렇게 엄마가 집을 나가고 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언니오빠들도 집을 떠났고 결국 아버지마저 어딘가로 사라진다.
일곱 살 카야는 쓰러져가는 집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고, 자신을 학교에 데려가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습지 더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긴다.
또래들과 어울릴 기회조차 없이 그대로 쓸쓸한 인생을 살아갈 것 같던 그녀에게도 어느 날 사랑은 찾아온다. 처음으로 그녀는 타인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무한한 행복을 느끼지만,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마저 이내 그녀 곁을 떠나버린다.
P.196
카야의 정신은 쉽게 그곳에 살 수 있겠지만 카야는 그럴 수 없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테이트는 갯줄풀 속에 숨은 자신의 결단을 똑바로 직시했다. 카야냐, 아니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냐.
테이트는 생물학자가 되어 세상 속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갈망이 있다. 그러나 사람을 피하기 위해 기괴한 모습으로 종종거리며 몸을 숨기는 카야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삼 의문을 품어본다. 카야가 과연 이 습지를 벗어나 자신의 옆에 있어줄 것인가. 카야는 절대로 지금과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없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고 그는 카야 몰래 그녀의 곁을 뜬다.
P. 235
찌르레기가 이른 날갯짓을 시작해도 판잣집은 고요했다. 겨울 안개가 땅에 깔리면서 벽을 타고 커다란 목화솜처럼 덩어리로 뭉쳤다.
상실의 아픔은 또 다른 배신과 상처와 두려움을 낳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살아가야 했다. 아니 생존해야 했다. 세상의 폭압으로부터.
P.340
암컷 반딧불은 허위신호를 보내 낯선 수컷들을 유혹해 잡아먹는다. 암컷 사마귀는 짝짓기 상대를 잡아먹는다. 암컷 곤충들은 연인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을 자연을 통해 본다. 어떤 암컷들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수컷을 희생시킨다.
1969년 체이스 앤드루스의 주검이 발견된 날 이후로, 모두의 시선은 습지에 사는 마시걸(marsh girl) 그녀에게로 향했다.
체이스 앤드루스가 항상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야가 손수 만들어준 목걸이였다. 불리한 증거와 불리한 증언들. 그렇게 카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P.386
절대로 심장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
정신이 생각해 낼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를 수 있으니까
심장은 느끼고 또 명령하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길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시련을 헤쳐나갈 기나긴 길을
당신이 선택했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시들이 있다. 어맨다 헤밀턴이라는 시인의 시다. 스토리의 정황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시들이라서 의문스럽기도 놀랍기도 했는데, 그 시인의 정체도 반전이다. 중간중간 평화로운 풍경 묘사들만큼이나 카야의 마음을 표현한 이 시들이 이 책의 매력의 또 다른 포인트이기도 하다.
유색인들이 사는 구역,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습지 판잣집에 고립된 채 살던 소녀는, 수많은 새들과 곤충들이 잉태하고 소멸해가는 자연 속에 남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녀가 삶 속에 수놓는 색채들이야말로 정말 아름답고 맑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델리아 오언스 (Delia Owens)
이 책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학을 전공하고 아프리카에서 7년간 야생동물을 관찰해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이 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출간해 2019년 이래 서점가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 인기에 힘입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녀의 경험이 바탕이 됐을 생생한 자연의 묘사가 특히나 독자들을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문장 하나하나 찬찬히 곱씹게 되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인물들 각자각자의 캐릭터 묘사도 능숙하고 세련됐다. 누군가는 순수하지만 아직은 미숙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등하고, 또 누군가는 상대를 곁에 붙잡아두기 위해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결코 익숙치 않은 인내와 절제를 시도해 보다가 목표점에 도달한 순간 돌변하기도 한다.
습지를 노를 저어 유유히 나아가는 카야의 모습을 그리면서, 우리가 사는 공간과 카야가 사는 공간의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었다. 델리아 오언스의 삶의 철학에 경외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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