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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밤의 이정표 - 아시자와 요

by 비르케 2025.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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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도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돼. 이 감각을 잊어버리지 말고 몸에 잘 새겨놔.
움직이는 풍경을 잘 보고, 땅이 어느 쪽인지 항상 확인하는 거야.
...
아버지가 몸을 보호하듯 팔을 쳐들고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밤의 이정표 - 아시자와 요

밤의 이정표 ( 夜の道標 )
작가: 아시자와 요
장르: 미스터리
번역: 김은모
출판사: 블루홀6
초판1쇄 출간: 2025.01 
 

 

아시자와 요


1984년 도쿄 출생
2012년 제3대 야성시대 프론티어 문학상 수상 - <죄의 여백>
2016년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5위 -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2018년 제7회 시즈오카 서점 대상 -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2020년 제164회 나오키상- <더러워진 손을 거기에 닦지 마>
2023년 제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 <밤의 이정표>
 

 

밤의 이정표


아시자와 요의 < 밤의 이정표 >는 전체 여섯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미스터리 소설이다. 1990년대에 일어난 어느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그 사건의 용의자와 그를 쫓는 형사, 용의자를 숨기고 있는 여자, 그리고 우연히 사건에 엮인 두 소년의 이야기가 각각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의 시작은 초등학교 농구부 요스케의 독백 비슷한 서술에서 비롯된다. 요스케의 시선을 따라, 초등학생답지 않게 182cm의 큰 키를 가진 하루가 농구를 하는 장면을 본다. 농구 좀 한다는 요스케도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들어버리는 화려한 기술을 가진 하루. 한때 쟁쟁한 실력을 뽐내던 어느 실업팀 농구선수의 아들이다. 
 

요스케는 물통에 든 스포츠음료를 마시며,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민소매 티셔츠를 걷어 올려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모습을 스포츠타월로 이마의 땀을 닦는 척하며 훔쳐보았다.
하루는 무슨 동작을 해도 멋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몸놀림 하나하나에 강해지는 비결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유심히 훔쳐보다가, 하루가 고개를 들기 전에 한 박자 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마의 땀을 닦는 척하며 하루를 훔쳐보는 요스케의 시선.. 하루는 무슨 동작을 해도 멋있다. 하루가 고개를 들기 전에 한 박자 빨리 시선을 거두는 센스까지, 작품 초입에서부터 인물들 간 섬세한 심리를 잘 묘사한 책이란 느낌을 받았다.
 
아직은 어린 성장기 두 아이의 농구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재미를 줄까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요스케의 눈에 그렇게나 빛나 보이던 아이 하루는 잠시 후 차도로 뛰어든다. 요스케가 하루의 이름을 부른 순간에. 여기까지가 이 책의 1장 첫 부분이다. 

 
 
 

나가오 도요코는 냉장고 쇼케이스 안의 다랑어 김초밥에 할인 스티커를 붙이다 말고 돌아서서 스티커 다발을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계산대에 들어서려는데 계산용 트레이에 5백엔 짜리 동전이 툭 떨어졌다.
왼손으로 상품의 바코드를 찍고, 오른손으로 할인 버튼을 누르면서 "198엔 두 품목에 20퍼센트 할인을 적용해서 333엔입니다" 하고 알려주자 거의 말을 가로막듯 "소스 많이 넣어주세요" 하고 높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도요코는 가냘픈 손바닥에 거스름돈을 얹어주고, 소스를 한 움큼 집어서 비닐봉지 속에 우수수 떨어뜨렸다. 한일자로 맞물려 있던 여자의 입술이 웃는 형태로 변했다. 

 
요스케에게서 바톤을 넘겨받듯 이번에는 도요코에 의한 서술이 시작된다. 반찬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도요코. 반찬팩에 할인스티커를 붙이다가 계산대에 선 손님을 보고 스티커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한 손으로는 바코드를 찍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할인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서도 손님의 취향을 존중해 손님이 원하는 바를 채워준다.
 
복잡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폐기될 반찬들을 챙기는 그녀. 누군가에게 반찬을 가져다주고 있다. 오래전 사라진 한 남자를 집에 은닉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도 한때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지만 외로움이 너무나 큰 나머지 행여나 남자가 사라질까, 또 한 번 외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과거 어느 시점의 선택이 어쩌면 그녀의 삶을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부턴가 하루는 달리는 차를 바라봐도 더는 무섭지가 않았다. 그저 다른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지독한 긴장감과 기묘한 고양감만 밀려왔다. 마음이 수렁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 왜 그렇게 울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게 뭐가 그리 슬펐을까.
이제 깨물 곳이 거의 없어진 손톱을 깨물며 검게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무슨 방송이라도 보면 허기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텔레비전을 틀 기분이 아니었다. 틀어놓으면 반드시 음식 광고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아버지를 두었지만, 하루의 아버지는 하루에게 못된 일을 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다치게 한 다음, 합의금을 받아 그 돈을 쓰며 산다.

돈을 들고 아버지가 사라진 다음, 하루는 허기진 빈 속을 달래며 방안에 뒹굴거리다가 어느 집 마당에서 반찬팩을 발견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어떤 남자가 고양이들을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도망칠 곳을 찾아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돌아왔다. 속임 동작에 걸린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서, 빈말로도 좋은 몸놀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허리 위치가 높고 하루라도 간단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반응이 별로였다.
아버지가 몸을 보호하듯 팔을 쳐들고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아, 하고 하루는 아버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무서워도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돼. 이 감각을 잊어버리지 말고 몸에 잘 새겨놔. 움직이는 풍경을 잘 보고, 땅이 어느 쪽인지 항상 확인하는 거야....

 
차 앞에서 무서워도 절대로 눈을 감지 말고 주변을 살필 것을 당부했던 아버지가 두려움 앞에 눈을 감았다. 아들 뒤에 선 채로 아들에게 억지로 시켰던 일들을 자신은 정작 해낼 배짱도 없었던 것. 부끄러움과 실망만이 남은 공간.
 
이정표가 되어주었어야 했을 어른들의 어리석은 민낯, 이 책이 말하고 싶은 바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부모가 되어야 어엿한 어른이라는 풍조가 세상에 아직 남아 있지만, 그런 풍조에 얽매여 인생을 살아가면 더 고달프고 불행해질 수 있다고요... 일단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아니었던 시절로는 못 돌아가요. 그 후로는 평생 부모로 살아가야 하는 거죠... 겐은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버거운데, 과연 아이의 인생까지 짊어질 수 있을까요?

 

열다섯 살 자식의 삶의 이정표를 자신의 의지대로 바꾸어버린 또 한 명의 어른.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쇼타로 형사는 자신이 그녀를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고, 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료에서 수없이 그녀의 이름을 봤을 건데도, 그녀는 그저 용의자의 어머니였을 뿐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걱정과 불안을 떨쳐버릴 가장 간단한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를 그녀였다. 장애가 있는 아들의 그늘에 가려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다 다른 이들의 부추김까지 더해지자 결국 과감한 선택을 하고 만다. 그것이 아들을 위한 길이라 여기면서.

 

 

이미 밤이라 길은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것처럼 어두웠지. 앞을 달리는 선생님은 길을 꺾을 때마다 손을 들어서 신호를 보내줬어. 그걸 보면서 생각했지. 아아, 저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면 틀림없구나." 

 

남자는 도가와 선생님을 믿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어른다운 사람이었으니까. 어둠 속 이정표가 되어주던 사람이었으니까.

 

하루가 원하는 대로, 자신도 선생님처럼 하루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루를 데리고 자신의 기억 속 장소인 공원으로 향한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를 오랜만의 여행이다.
 

 

 

정리


두 소년의 농구이야기로부터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올까 궁금했다. 제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니 뭐가 있을까 하며 읽는데, 자해공갈?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끝부분에 대두된 우생학 관점에서의 우생수술은 전혀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구성도 독특했다. 인물들 각각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그렇다고 일인칭만의 서술도 아니다. 이야기들은 서로가 맞물려 이어지다가 마침내 결말에서 아귀가 맞춰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사소한 인간의 감정 하나까지 글로써 담아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던 점도 좋았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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