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伊文'이었다. 독일에 두 번째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완 출신 그녀를 알게 되었다.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살다가 내가 있던 도시로 공부를 하러 온 음대생이었다.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당시의 나는 '페이샹'이라는 예전 친구를 많이 그리워했기에, 같은 동양인 여자애들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곤 했었다.
'伊文'이란 자신의 이름을 두고, '네 이름을 한국에선 '이문'으로 발음한다'고 했더니, '이문'이든 '이벤'이든 발음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편하게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자기는 '패트릭'이 아니라, '빠뜨릭'이라 강조하던 어떤 애가 마침 떠올라, '이게 동양식 관대함이야.' 하며 웃었던 기억도 난다.
동양인들끼리는 일종의 '이심전심' 같은 게 있어서인지, 아니면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서인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외국에서 다양한 인종을 겪다 보면 개개인의 특성을 떠나 '동양 마인드'라는 게 참 서로를 가깝게 만들곤 한다. 그때까지 나에게 있어 동양인의 표상은 앞서 언급했던 예전 룸메이트 '페이샹(倍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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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도 페이샹처럼 타이완 출신이었지만, 페이샹은 어학을 하러 이제 막 독일에 와서 연고도 없고 벗도 거의 없는 상태였던데 반해, 이벤은 달랐다. 그녀는 이미 빈(Wien)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곳도 독일어 권역이다 보니 독일어도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다. 그러나 너무 어린 시절에 외국에 정착해서 그런가, 가끔씩은 까칠하니 나름의 상처를 드러내기도 했다.
철 없던 십대의 어린 나이에 나는 뭘 했었는지 떠올리며, 어쨌거나 힘든 시간들을 거쳤을 그녀가 참 대단하다 느껴졌다. 그녀의 집에는 타이완에서 공수된 수많은 식재료와 차들이 즐비했다. 그녀의 건강을 걱정한 부모님이 보낸 것들이었다. 그토록 아끼는 딸을 어린 나이에 타국에 보낸 그녀 부모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지 당시로서도 참 궁금했다. 곁에 늘 끼고 있고 싶은 딸일테지만, 기어이 떠나보냈을 그들이 꿈꾼 자식의 미래는 또 어떤 것이었을지...
마리엔베르크 요새(Festung Marienberg) 입구. 이벤도 뷔르츠부르크가 처음이라 둘이서 이곳에도 자주 갔었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주로 WG(베게: Wohngemeinschaft 줄임말, 셰어하우스)나 기숙사를 이용하는 것과 달리, 이벤은 단독을 얻어 살면서 타이완 요리를 즐겼고 나를 자주 초대해 주었다. 이벤과 나는 급격하게 친해졌고, 학교 등지에서 수많은 일상을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빈(Wien)에서 만났던 동양인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이나 똑같이 'arrogant' (거만)하고 자신들이 'dominant' (우월)하다 여긴다고 했다. 특히 한국 여자애들은 공주처럼 차려입고 다니면서 잘난척하는 걸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들이 싫어서 소도시(뷔르츠부르크)에 왔는데 여기도 한국인, 일본인이 깔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많이 친해져서 할 말 못할 말이 없어지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게 된 그녀였다. 여기서 그녀의 이야기를 끊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얹힌 듯한 속풀이를 나는 반대로 해석했다. 타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같은 동양인들에게 얼마나 맺힌 게 많았으면 저럴까 싶어서 인간적인 연민마저 느꼈다. 더군다나 다른 도시에서 나 또한 그 철 없는 '공주(?)'들의 행적을 보았던 터라, 이벤의 말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모두가 다 같지는 않으니 잊어버리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 사단이 난 건, 한국어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중국어는 성조가 있어 아름다운데 한국말은 이렇다.' 하면서, 검지를 들어 수평선 하나를 거침없이 쫙 그었다. 사실 그녀는 중국어를 두고도 중국 본토의 말을 흠 잡았던 적이 있었다. 같은 중국어라도 타이완을 포함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말이 부드러워지고, 위로 올라갈수록 거칠고 상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조조차도 없는 한국말은 그녀의 손가락 하나로 쫙 그어지는, 아주 개성 없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한국인임을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일까, 대화를 독일어로 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잠깐 까먹게 되었던 것인지... 할 말을 잃고 있던 내게, 그녀는 그걸로도 부족했던지 작심한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국 글자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시옷을 말하는 듯), 그리고 수많은 막대기밖에 없어."
독일에서 처음 사귄 친구였고, 다른 점에서는 그녀만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녀를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에 결국 나의 차가운 대답이 이어졌다.
"나 한국 사람이거든."
사진 두 장을 이어 붙였다. 가운데로 보이는 다리가 구교인 알테마인교(Alte Mainbruecke)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는 이 다리에서 바라다본 마리엔베르크 요새 사진을 올렸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내려다본 시가지의 모습이다.
그 이후 그녀도 나도 먼저 연락하는 일 없이 그대로 멀어졌다. 함께 알던 친구의 생일에 초대되어 서로 나란히 앉게 된 일도 있었지만, 서로 어정쩡한 미소와 함께, 잘 지내? 응. 너는? 나도. 하는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가 끝이었다.
같은 동양인이라 이심전심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와 일본, 중국, 타이완은 이웃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친근감과 함께 반감까지를 모두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이벤으로 인해 새삼 알게 된 이후, 페이샹에 대한 그리움은 접은 채로, 동양인 친구에 더는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 독일에 갔을 때 페이샹, 두 번째는 이벤을 타국에서의 첫 친구로 사귀었고, 세 번째 가게 되었을 때는 '렌'이란 필리핀 친구를 알게 되었다. 세 번 다 동양인 친구다. 먼저의 두 번은 20대 때의 일이고, 렌을 처음 만난 건 그로부터 한참 후, 지금으로부터는 거의 10년쯤 전에 독일의 어느 상점 앞에서였다.
주말 먹거리들을 잔뜩 담은 짐들을 어깨에 메고 양손에 든 채 상점을 나서는데 승용차 한 대가 내 곁을 스쳤다. 그때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나를 기분 나쁘게 스캔하며 지나갔다. 나보다 더 짙은 피부에 더 까만 머리칼을 가진 동남아 여자였다. 졸지에 기분 나쁜 눈빛의 '위아래 훑어 내림'을 당한 나는, 그렇잖아도 뚜벅이로 버스정류장까지 걸을 일이 버거웠는데, 순간 몸에 달라붙어 있는 짐들의 무게가 두 배는 더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스치듯 지나쳤던 그녀는, 나중에 알고 보니 우연히도 나와 한동네에 살던 필리핀 여자의 동생이었다. 순간 그 기분 나쁜 '훑어 내림'은 나의 느낌이었을 뿐, 나중에 알게 된 렌은 결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도 예전의 나처럼, 같은 동양인에게 관심이 많은 나머지, 그 관심을 '한번의 시선 던지기'로 표했을지 모른다.
린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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