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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겨울, 그리고 우울한 이야기들

by 비르케 2009.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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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대부분은 어떤 계절을 좋아할까요? 제 아이들은 겨울이 좋다고 합니다. 작년에 그 혹독한 추위를 맛보고도 여전히 겨울이 좋다고 하는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하더군요. 눈이 내리니 좋다고 합니다. 학교 뒷마당 주변에 숲이 있는데, 작년 겨울에 아이들은 그 비탈진 곳의 얼음판 위에서 친구들과 함께 바지째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를 하며 놀곤 했습니다. 바지가 젖고 진흙이 묻어도 아이들의 놀이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런 아이들과 반대로, 어른인 저는 이번 겨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독일 와서 건강도 안 좋아진 것 같고, 가장 큰 여파는 피부에 나타나더군요. 피부가 몰라보게 거칠어 졌습니다. 추위때문일 수도 있고,  이 지역의 물 때문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드는데, 어쨌거나 독일에 와서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이... ㅜㅜ

게다가 독일에도 서서히 올 것이 오고 있습니다. 연일 뉴스에서는 신종플루 관련 소식들을 전하는 가운데, 아이를 둘이나 둔 엄마이다 보니 최근 미국발 신종플루 관련 우울한 소식들에도 민감해지곤 합니다. 이런 와중에 다음달에 큰애네 반 전체가 4박 5일 여행이 예정되어 있어, 좀 걱정되기도 하고 차라리 안 갔으면 싶기도 합니다. 이번 주말도 내내 감기로 골골거리는 걸, 매일 밤 뜨거운 물이 든 고무 물주머니(뜨끈한 방바닥이 있으면 이런 건 필요도 없을 텐데요)를 안겨서 재우고 있거든요.     

살면서 겨울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올해는 정말 겨울이 다가오는 게 유독 싫습니다. 며칠 전 우울한 소식을 들어서 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저희집 하우스마이스터(건물 관리하는 사람)가 갑작스레 그가 '개인적인 사정'이라며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젊은 남자가 그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새로 온 그 젊은 남자는 전임자에 비해 요구가 많고 까다롭습니다. 오후 5시 이후로는 전화하지 마라, 시간 외 호출은 한번에 얼마의 수고료.. 등등, 아마도 그가 독단으로 내 건 조건은 아니고, 집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인정했거나 새로 만든 조항일 거라 생각은 드는데, 너무 깎쟁이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만둔 예전 하우스마이스터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무슨 일이 나면 곧장 달려와 주던 사람이라, 아는 사람 별반 없는 외국이지만 참 든든했습니다.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옛 유고 연방들 중 하나가 고향인, 저와 마찬가지로 같은 외국인이다 보니 제 일은 누구보다 잘 챙겨주던 사람이었지요. 그러던 그가 안 보여서 이유가 뭔지 궁금했지만, 건물에 붙어 있는 알림판에 그저 '개인적인 사정'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요.

그런데 며칠 전, 아래층에 살던 아주머니랑 이야기하다 궁금해 물었더니, '슐락안팔(Schlaganfall)'에 걸렸다고 하네요. '슐락'이라는 게 '뭘로 내려치는 것', '때리는 것' 등을 의미하는 단어라서, 대체 어디가 아픈 건가 했는데, 집에 와 사전을 찾아보니 '뇌졸중, 뇌출혈'이더군요. 아직 50대의, 이른 새벽부터 늘 분주히 일손을 움직이곤 하던 그였는데, 어쩌면 그런 부지런함이 그런 병을 불렀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날이 급작스레 추워지는 요즘같은 때 조심해야 되는 병이라 들었던 적이 있거든요. 

언젠가 제 집 화장실 불이 고장나서 그가 공사를 해준 적이 있는데, 그때 바짝바짝 잘려진 벽 속의 전선을 보고, "독일 사람들 봐라, 이걸 아낀다고 이리 짧게짧게 해놓냐, 쯧쯧" 하며, '같은 외국인'으로 맘 편하게 독일사람 흉을 보던 그때 그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병든 몸으로, 그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그는, 병든 몸일 망정 한편으로는 행복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 독일에 와 있는 옛 유고 지역 사람들 중 대다수가 오래 전 내란을 피해 온 이들입니다. 그도 그때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라면, 이제는 돌아가 자신의 땅에서 살아봄도 행복할 거라, 꼭 건강을 회복해 조국의 새로운 모습에 감동할 거라 믿어봅니다.

하우스마이스터를 떠올리다 보니, 덩달아 기억 하나가 더 떠오릅니다. 
십여년 전 독일서 만난 친구가 옛 유고 지역의 나라들 중 '코소보'에서 온 친구였습니다. 당시 코소보 내전을 피해 자전거에 피난짐을 싣고 수도인 프리슈티나를 빠져 나왔다던 그 친구는, 늘 슬픈 눈동자에, 인생을 다 알아버린 얼굴로 미소를 짓곤 했는데, 그 친구도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갔을지 궁금해집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지은 시가 일기장에 들어 있어서 이것도 기회랍시고 한번 옮겨봅니다.  


 자전거

너는 자전거를 타고 머나먼 길을 왔다 했지

그 때 엉뚱하게도 낭만이란 단어를 떠올린 내게
어느 시에프에서 처럼
햇살에 거울을 빛내며 가슴속으로 들어오던 자전거,
나의 자전거는 늘 그렇게만 스쳐 갔을 뿐,

먼지와 비로 흐릿한 죽음의 고향을 멀리한 채
가늘게 떨며 낯선 길을 내달렸을
너의 자전거는
눈동자 속
불안과 슬픔이 되어 홀로이
이방의 거리를 기웃거리며
너를 닮은 이들에 손을 내민다

오늘 너는 어디에 있는지,
나의 마음속에는
어느 하늘 아래
고개를 떨군 채로
사랑을 그리며 지나는 기나긴
슬픈 페달 소리가 들려온다.

.... Z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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