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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금 간 머그를 보며..

by 비르케 2021.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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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사람이 있듯이, 버리기 힘든 물건들도 있다. 그런 물건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벼르고 벼르다가 장만한 물건들도 의미 있지만, 함께 해온 시간들이 소중해서 세월가도 버리기 힘든 물건도 있다. 금 간 머그잔을 앞에 두고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 

 

금 간 머그를 보며..

 

오래돼서 금이 간 머그

Damit es alle wissen :
Ich war schon mal in Bad Neustadt / Saale
이걸로 모두가 알게 되겠지,
내가 바트 노이슈타트에 다녀왔다는걸

 

 

머그에 적힌 문구만으로도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구와는 달리, 이 머그를 보고 내가 노이슈타트에 다녀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번도 노이슈타트에 다녀오지 않았다.

 

이 머그는 아주 오래전 독일의 어느 벼룩시장에서 산 것이다. 통화가 유로로 바뀌기 이전에 단돈 1마르크도 안 되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50 페니히에 거저 가져오다시피 구매했다. 

 

 

 

예쁘지도 않은 이 머그를 샀던 이유는, 맨 아래 있는 '노이슈타트(Neustadt)'라는 도시 이름 때문이었다. 당시 셰어하우스에 함께 살던 세 명의 독일 친구들 중에 노이슈타트가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나는 이 컵을 사서 그 친구에게 보여주며, "너희 고향이라 샀어. 원하면 너 가져."라고 말했다. 관광지에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 고장의 기념품을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서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그곳은 내 고향이 아니야."

 

독일에 노이슈타트가 한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지명이 같은 경우 뒤에다 추가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는데, 이 머그에 있는 노이슈타트 뒤에도 '/Saale'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다. 잘레(Saale) 강 옆에 있는 노이슈타트를 일컬었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크푸르트도 독일에 같은 지명이 두 군데이기 때문에 강으로 구분 짓는다. 프랑크푸르트의 정식 명칭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즉, '마인강 옆 프랑크푸르트'이다. 

 

 

그렇게 친구의 고향도 아니고, 내가 가본 적도 없는 노이슈타트 안 데어 잘레(Neustadt an der Saale)의 기념품은, 넉넉한 사이즈로 향기 좋은 에두쇼 커피를 담아 날마다 내 책상에 오르곤 했다.

 

그게 90년대 말 이야기니,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지났다. 수많은 그릇들 속에, 자주 쓰지 않지만 버릴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찬장에 묵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이렇게 금이 가 있다. 내 마음 한구석에도 "쨍~~~"하는 금속성의 저릿한 울림이 들려온다. 다 이겨도 세월이란 놈은 이길 수가 없다. 이제는 보낼 때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다. 

 

다행히도 내게는 아직 그곳의 추억을 소환할 만한 몇 녀석이 남아 있다. 가난한 학생 신분으로 독일에 있으면서 언감생심 값비싼 독일 그릇들은 넘보지 못했어도, 나 같은 사람 반기는 벼룩시장은 많아서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찬장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 건재하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기념 장식품
뷔르츠부르크 기념 장식용 접시

 

뷔르츠부르크를 상징하는, 시청사, 돔, 마리엔베르크 요새, 홀츠토어의 옛 모습이 새겨진 접시.. 그릇으로 써도 안 될 건 없지만, 뒷면에 걸이를 걸 수 있는 구멍이 있어 주로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접시다. 2009년에 뷔르츠부르크에서 개당 1유로 달라는 거 깎아서 모두 3유로에 구매했다. 지금 집은 걸기가 애매해서 찬장에 넣어두었는데, 언젠가는 벽에 걸어두고 싶다. 

 

 

 

독일 여행 기념품_컵받침
여행기념 컵받침
컵받침 뒷면

 

여행지에서 사랑 많이 받던 아이템 중 하나, 컵받침이다. 컵받침은 하나만으로 족했는데, 벼룩시장이 파할 무렵에 한꺼번에 3마르크에 파는 사람이 있어서 모두 샀었다. 이것도 90년대 말에 산 수공예품이다.

 

앞에서 봤을 때는 멀쩡한데, 뒷면을 보니 하나가 금이 가 있다. 아까의 그 뇌리 속 금속성의 울림은 들리지 않는다. 아직은 쓸만한 것 같아서? 아니, 노이슈타트 머그보다는 쌓인 추억이 덜해서다. 

 

같은 날 산 컵받침인데, 맨 오른쪽 위아래에 있는 두 개와 맨 왼쪽 위에 있는 것, 이 세 개만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중에서 하나가 깨지면 아마도 마음이 많이 아플 것도 같다. 아끼던 그릇장에 있던 녀석들을 사진으로 이렇게 정리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설령 깨지더라도 포스팅이라도 남으니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티스토리는 언제까지나 건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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