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 '남아 있는 나날'을 읽다 보면,
'남아있는 나날'에 대한 희망보다
살아온 나날에 대한 회한이 더 강렬해진다.
달링턴홀에서 평생을 집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며 최고의 집사로 살고자
평생 주인만을 바라보며 산다.
원칙적이면서도 반듯한 그의 삶의 태도는
자신에게 있어 '위대한 집사'로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덕목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가 지나온 날들을 더듬었을 때
일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상 사람들이 주인이었던 달링턴경을 보고
나치 조력자라는 이유로 아무리 욕을 해도
스티븐스 만큼은 주인의 순수함을
의심치 않았다.
(사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 맨 끝 번역자의 해설처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논할 정도의
거창한 주제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티븐스에게 보여진 그의 주인은
잔악한 나치주의의 동조자가 아닌,
싸움 후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신사의 모습 정도로 보여지지 않았을까.
사실 달링턴경보다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띄지만
그들은 세월이 흘러 전세가 바뀌자
오히려 잽싸게 자신의 포지션을 바꾼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스티븐스에게 달링턴경은
끝까지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직무에 충실하고자 그는 가지 못 했고,
자신에게 마음이 있던 켄턴양의 진심도
헤아릴 새 없이 떠나보내고 만다.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된 지금
달링턴홀은 새 주인에게로 넘어가고,
근엄하고 자상한 영국 신사 달링턴경에게
최적화되어 있던 스티븐스의 삶도
유쾌한 미국인 주인에게 맞춰
새로 바뀌어야 할 시점에 놓였다.
누군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그러니까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집과 함께 남은 것이로군요. "
잠시 아파하던 그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 속에서
재치있는 농담이 깃든 대화를 새겨들으며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새 주인 패러데이에게도
세련된 우스갯소리를 곁들여 말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아 있는 나날은 그가 새로운 주인과
앞으로 여생을 열심히 살아야 할 날들이다.
세상이 바뀌고 영욕의 세월을 거쳐
웅장한 저택들도 그 이름이 퇴색되었다.
달링턴홀 뿐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저택들이 예전처럼 손님으로 북적일 일도,
거하게 만찬을 벌일 일도 없음에
방마다 흰 천에 가려져 있다.
다들 날마다 그 많은 방들을 쓸고닦고 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달링턴홀의 새 주인 패러데이 역시
만찬과 파티에 익숙했던 영국인들과 달리
쓸모 없는 인원을 감축하고
최소한 인원으로만 집을 관리하길 요구한 것인데,
스티븐스로서는 '위대한 집사'의 위신이 있지,
흰 천으로 방을 가리는 짓 따위는 할 수가 없어
적은 인력으로 부단히 애를 썼던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집사였지만
나이가 들자 결국 은 식기도 제대로 닦지 못 하고
집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 쓸쓸히 죽어간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돌아보며
그는 자신의 남아 있는 날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저택의 주인인 패러데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또 남아 있는 날들 동안 족히 생각해 봄 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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