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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보..

벼룩시장에서 연출된 '한국인 아닌 척 하기'

by 비르케 2009.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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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 아닌 척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예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친구들과 장난으로 많이 했던 놀이인데요, 사람  많은 곳에서 친구 중 누군가가 엉뚱한 실수를 하게 되면, 그래도 조국 망신은 안 시킨답시고 얼른 일본인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좀 엉뚱하다면 엉뚱한 장난이었지만, 별것 아닌 일에도 깔깔대던 어린 나이의 여자애들 또래였으니 그런 장난은 언제든 유쾌하기만 했습니다. 실수한 친구가 일본인 흉내를 내면,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어설픈 일본어나 일본 발음 비슷한 한국어를 하면서 그 친구를 놀려대곤 했습니다. 이런 식이었지요.   

"아나따와 띤따로 빠가데스네~"

중국인 흉내는 발음에도 무리가 따르고, 굳이 중국인 보다는 그래도 일본인 흉내가 쉬우면서도 더 재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죽이 맞는 친구도 없거니와, 그런 장난을 할 기회도 없다보니, 그런 장난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런데, 얼마전 벼룩시장에서 저를 중국인으로 착각한 사람이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잠깐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인 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주 시니컬한 목소리로, 제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이거 중국에서 이미테이션 나오는 거니?"

독일어니까 반말도 존칭도 아니었지만, 그가 던진 말은 어쨌든 공손한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이유는, 제가 카메라로 벼룩시장에 펼쳐져 있던 자신의 물건을 찍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가 먼저 잘못을 했지요. 양해를 구하고 찍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뭐, 처음에야 일일이 양해를 구했지만, 한 시간 가까이 돌아다니면서 사진까지 찍다 보니 나중에는 묻는 것도 피곤해지기도 하고... 그러다 그런 상황을 맞딱뜨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벼룩시장에서 사진을 찍게 되는 물건들은 대부분 가지고 싶은 물건이라기 보다 신기한 물건들 위주입니다. 그날 제가 사진을 찍던 그의 그릇세트도 가지고 싶다기 보다는 특이해서 찍은 것이었습니다. 독일 벼룩시장에 가끔 나오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찜기나 티워머까지 다 갖춰진 풀세트이기도 하고, 손잡이 등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이었지요. 어쩌면 원래 독일 스타일도 아니고, 인접해 있는 다른 나라 그릇일지도 모른단 느낌도 들었구요. 

예전 독일에 있을 때는 벼룩시장에 참 진기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솔직히 요즘 벼룩시장은 그때에 비해 마음이 드는 물건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유로샵(1유로 물건을 주로 파는 곳)에서 새것을 사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 허접한 물건들에, 중고지만 부르는 가격이 그다지 싼 것 같지도 않구요. 그러니 사진 찍은 댓가로 뭘 하나 사주려 해도 살만한 걸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중국에서 이미테이션 나오는 거니?" 라고 비꼬는 남자에게, 사과와 함께, 난 중국인 아닌 한국인이고, 이미테이션에는 관심도 없거니와 그저 내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려고 한다고 설명을 해 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삐딱한 그의 옆에는 정작 어느 동양인 여자가 서서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고 있더군요. 외모로 봐서는 한국 아니면 일본, 또는 중국인 중 하나였습니다. 아내인지, 애인인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인은 아니니까 그런 소리에도 그저 미소만 흘리고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한국인 아니면 일본인, 그도 아니라면 이쪽 피가 흐르는 독일인일 텐데, 그녀의 모습에 저도 뭐라 말을 꺼내기가 더욱 애매해졌습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만나는 건 너무 어색했고, 일본인이라는 증거도 없고... 순간 복잡해진 마음에, 일단 물건이나 하나 팔아 주고 정황 설명을 하면 조금은 마음이 풀리겠지 했는데, 역시나 살 물건이 하나도 없더군요. 그냥 아무거나 살까도 생각했지만, 그 또한 비싸게 부른다면 가격만 묻고 돌아가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살다 보니 짐 되는 물건은 사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요. 살림이라면 그저 여행객보다 조금 더 가진 데서 만족하는 게 여러 모로 저는 편합니다.    

결국 그 물음에 대답도 못 하고, 아무 것도 사지도 못 한 채, 두 사람이 건네고 있는 미소(라기 보다는 이른바 '썩소')에, 저 또한 미소(라기 보다 마찬가지로 '맞썩소?')로 화답하고 그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그렇게 어색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던 건 바로, "한국에서 이미테이션 나오는 거니?" 가 아니라, "중국에서 이미테이션 나오는 거니?" 라던 그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굳이 그 자리에서 "난 한국인이야!" 밝히기 보다 그냥 그쯤해서 자리를 떠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예전에나 하던 '한국인이 아닌 척 하기' 놀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한국인 아닌 척 하기' 놀이는 죽도록 재미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도 아니고 혼자 하려니 더 그렇더군요. 이제 다시는 하지 않으려구요. 다시 그런 일이 없으려면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일일이 물어보고 찍는 매너를 지켜야 겠지요. 그 날 이후 그런 부분은 벌써부터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위의 사진이 그 사람이 가지고 나왔던 물건인데요, 욕심나는 물건 있으신가요? 당시 아무리 들여다 봐도 그의 물건 중 가지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서 일이 더 난감해졌습니다. 아예 안 고르던지 얼른 하나 골라잡던지 했어야 했는데, 오고가는 낯선 미소(?)속에 하나 팔아주려고 더 머물다 그냥 돌아선 꼴이라, 그 사람도 약이 좀 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식 정서로, 맘에 안 들지만 어쨌든 미안하니까 아무거나 하나 집어들걸 그랬을까요?
합리적 사고가 통하는 나라니까, 맘에 안 들면 바로 돌아서야 했을까요?

답은 이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독일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된 한국인이다 보니 순간 가운데서 절절 매고 말았습니다. 앞으론 정말이지 화끈하게 둘 중 하나만 해야 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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