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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비 내리는 날 이야미스 읽기 - 마리 유키코 < 이사 >

by 비르케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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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유키코의 < 이사 >를 읽으면 자꾸만 몸이 근질거리고 어딘지 답답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음습하고 알 수 없는 곳에 이끌린다. 그곳에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벌레가 있다. 포악한 굉음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차에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밤늦은 시각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로 그 빗속에 배회하며, 아슬아슬 육교 위에서 중심을 잃기도 한다. 뭔가를 빠뜨리고 나와서 다시 들어간 사무실에는 평상시와 다른 모습의 직장 동료가 보이고, 맘속으로만 이야기할 뿐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들의 어눌한 표현과 몸짓, 그리고 겉으로는 상냥할지언정 속으로는 매우 잔인한 주변인이 존재한다. 

 

마리 유키코는 '이야미스'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된다. 이야미스에 대해서는 책의 표지에 설명이 되어 있다. 일본 단어 '이야다(いやだ : 싫다)'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조어, 이야미스는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불쾌하고 어두운 감정을 집요하게 파헤쳐서 심리적 불편함과 여운을 남기는 장르라고 한다. 위에서 기술한 저런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사 - 마리 유키코

"심약자는 해설을 먼저 읽을 것"이라고 되어 있어서 본인이 심약자인지부터 체크해봐야 했지만, 막상 읽다 보면 생각보다 참아줄 만한 엽기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주변의 물건을 둘러보면 그제야 뭔가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 특히나 낯선 집에 새로 이사 와서 그곳에 원래 있던 공간이나 수납장 등을 보게 될 때, 여행지에서 좀 더 저렴한 숙박을 위해 에어비앤비 숙소에 머물게 되었을 때, 그런 때 문득 두려움이 밀려들 것만 같다.

 


'문', '수납장', '상자', '책상', '벽', '끈', 이렇게 <이사>는 총 여섯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에 자신을 데려다 놓고, 궁금하면 뭔가를 꼭 밝혀내야 직성이 풀린다. 살던 집에 계속 살면 되는데 굳이 이사를 하고, 새 집에 오자마자 또 옮기고 싶은 곳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중으로 해야겠다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잠도 자지 않고 눈을 비비며 해낸다. 

 

필요없는 찐빵을 네 개나 사버린 주인공

그중 한 이야기 속 주인공.. 이사를 위해 짐을 싸던 주인공은 상자가 부족하자 야심한 시각에 비를 맞으며 편의점을 찾는다. 상자 두 개를 얻으려던 것이, 공짜로 얻기는 뭣해서 초콜릿을 집었다가, 편의점 직원의 표정이 걸려서 추가로 찐빵을 더 구매한다. 저렴한 일반 찐빵을 사도 되건만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디럭스 찐빵을 달라고 한다.

 

"몇 개나 드릴까요?"

직원의 이 말에, '뿌이(V)~ (찡긋)' 하며 애교라도 부리듯 얼굴에 손가락 두 개를 갖다대버린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어서 남자라는 생물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남자가 무서워서 그런대나 뭐래나.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할 짓이 아니다.'라며 자신을 타박하는 것도 잠시, 찐빵을 그 정도 샀으니 골판지도 당당히 세 개는 얻고 싶었건만, 골판지 세 개를 달라는 주인공과 찐빵을 꺼내려고 집개를 들었다가 찐빵을 세 개 달라는 소리로 이해하고 찐빵 세 개를 담는 편의점 직원..

 

편의점 직원 입장에서는 찐빵 두 개를 달랬다가 다시 세 개를 달라는 그녀에게, 한 번 더 확인차 세 개면 되겠냐 묻는데, 그녀, 하나 더 달라고 하고 만다. 총 네 개의 디럭스 찐빵과 초콜릿을 사버린 그녀. 이 우유부단하고 매몰차지 못한 주인공과 똑닮은 한 명이 책 뒤에서 또 나온다. 다테마에의 표상을 보는 듯해서 나름 흥미 있는 부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미스터리의 기본은 지나친 호기심과 세심한 관찰력이 아닌가 싶다. 거기다 주인공은 독신이 많다. 직장에서 돌아와 아이에게 치대일지언정 저녁의 여유를 즐기며 오컬트 같은 건 관심도 없이 지냈더라면 다치치 않았을 주인공들인데, 도움 줄 사람 하나 없이 꼭 답답한 곳에 들어가 숨을 헐떡이고 비 오는 밤을 배회하고 침침한 눈을 비비며 뭔가를 찾고자 한다.

 

도저히 그 정도까지 탐색은 안 할 것 같은 독자에게 일일이 까서 보여주고, 다가가 펼쳐주고.. 그게 또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맛보는 묘미다. 더군다나 이야미스는 이번처럼 눅눅하고 지루하게 온종일 비가 쏟아지는 날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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