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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유노의 미술 시간..

by 비르케 2009.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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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가 집에 돌아와 말한다.
"엄마! 오늘 타진 애가 새로 왔는데..."

"타진 애가 뭐야?"
"시꺼먼 애요."

순간 유노는 찌릿한 내 시선에 움찔한다.
다음 번에는 절대로 그런 말 안 하기로 수차례 다짐을 받고서야
야속하기도 했을 법한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려고 했던 말을 잘리고, 대신 야단을 맞고 나자
유노는 뭔가 말하려던 걸 접고, 아니라고 하면서 그대로 달아난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그림 한 장을 냅다 던져주고 간다.
'얼굴 그리기'다.
(흑인 아이라니) 이 그림이 유노가 말하려던 그 아이일 리는 없고.
이 그림과 또 말하려고 했던 그 아이와는 어떤 상관인지...

이번엔 내가 궁금해서 유노를 무릎에 기어이 앉히고는 묻는다.
"새로 온 애가 어쨌는데?"
"자기 얼굴을 그리라고 했는데, 그애는 웃겨요.
자기 얼굴 검정인데, 살색으로 그려요."  
그러자 옆에 있던 세오가 한 마디 거든다.
"어? 우리반 '로벨'도 그러는데.."

흑인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낯설음이 있을 게다.  
다른 애들 다 살색으로 얼굴을 그리는 미술 시간에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자기 얼굴을 어떤 색으로 칠할 지 고민이 될 터다.
아이들이 하는 고민치고는 가혹하지만
이러한 고민들도 타국에서 살아가는 방법, 타국에서의 낯설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가장 기본적인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내 아이들도 그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다.
'살색', 최근에 '연주황'으로 명칭이 바뀐 색깔을
한국에서 부터 지금까지 습관처럼 피부색으로 쓰고는 있지만,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얼굴로 택하는 색은 '연주황'이 아니라, '노랑'이나 '갈색'이라는 걸
아이들이 아직 알 리 없다.

유노가 그린 '눈' 색깔만 하더라도 그렇다.
얼굴 그림 아래로, '나의 눈 색깔'을 묻는 질문에,
유노는 자기 눈을 자신의 표현마따나 '시꺼먼' 색으로 색칠해 놓았다.

"네 눈 색깔은 갈색인데, 왜 이렇게 까맣게 색칠했어?" 했더니,
"저도 갈색으로 칠했는데, 선생님이 '검정'이라고 다시 하래요."
그런 부분까지 콕 짚어 주는 선생님이 순간 얄미워진다.
설령 빨간색으로 눈을 그렸다 해도
아이들의 그림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관찰력이 다 깃들어 있건만,
어찌하여 갈색 눈을 까만색으로 다시 그리라 한 것인지... 

그림을 자세히 보니, 유노의 말마따나,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인 눈동자에
원래 갈색으로 칠해졌다가 검정으로 덮힌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그래도 흑인 아이들의 피부색에 대해서는 눈 감아 주셨으리라 생각한다.
흑인 애들 피부색까지 콕 짚어 주었다면 그건 정말..

좀더 큰 한국 아이들은 피부색 뿐 아니라,
'찢어진 눈', '낮은 코' 때문에도 고민을 한다고 한다.
한참 때 아이들이니, 우리나라 안에서 인들 거울 앞을 떠났을까,
타국에서 다른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때로 많은 좌절을 주겠지만,
반대로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좀더 자라면
아마도 갈색을 검정으로 바꾸라는 선생님의 말에도,
"보세요, 제 눈은 검정이 아니라 갈색이예요."
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게 될 것이고...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웃고, 뒹굴고, 미끄러지고...
옷이 성해서 올 때가 없을 정도인 내 아이들을 보면서,
이렇게 다른 모습의 사람들속에서도 그들과 서서히 섞여가고 있음에 안도한다.

"내가 형아보다 더 인기 많아야지!"
하는 엉뚱한 멘트를 던지고 학교에 입학한 유노는
자기 말처럼 친구를 꽤나 사귀었다.
어떤 여자애 하나는 아예 대놓고 졸졸 따라다니기도 한다.

유노는 오늘도 형에게 따지듯 묻는다. 
"형아, 친구 몇 명이야?"

아마도 어느 미술 시간엔가는
얼굴색도, 눈 색깔도, 머리 색깔도 다른 어떤 친구가 
'친구 그리기'라는 테마로 유노의 화첩에 등장할 것이다. 
유노는 그 많다는 친구들 중에 또 어떤 친구를 그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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