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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마음을 담아

엄마의 그릇장

by 비르케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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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그릇장 

어릴 때 엄마가 그릇장을 새로 들였다 
엄마의 아끼던 그릇들보다 그 그릇장이 더 좋았다 
나무틀에 유리가 끼워져 있고

주물 손잡이가 달랑거리던 
 
나중에 버리려거든 이거 나 줘? 
막 들여온 그릇장을 달라는 어린 딸 한 마디에 

엄마는 어이없어 크게 웃었다 
그래 니 가져라 
 
몇십 년 흘러 
그릇장은 문짝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베란다에 두었는데 어느 날 비가 들치더니 곳곳에 푸르뎅뎅한 녹도 묻어나기 시작했다나 
 
엄마가 아끼던 그릇들은 이미 싱크대 수납장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까르르 웃는 내 아이 들여다보느라 

그때는 친정에 그릇장도 다른 무엇도 흘낏 보고만 말았다 
 
그 아이가 자라 대학생이 될 때도

그릇장은 여전히 엄마네 있었다 
세월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그로부터 세월이 더 흘러 
칠순의 엄마가 이사하던 날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툴툴거렸다 
짐이 차에 다 안 실린다고 
견적을 어찌 본 것인지 
 
그릇장은 버려도 된다고 엄마가 말했다 
 
- 엄마, 어릴 때 이거 나 달라했는데, 기억나? 
(쓸래? 문짝도 틀어지고 징도 거의 나갔는데) 
- 우리집도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긴 해
 
그렇게 엄마의 그릇장은 옛집 쓰레기 수거장 앞에 멈춰섰다 
유리에 스티커 한 장 붙은 채로 
 
그날 자려는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아 잘못했구나

그러는 게 아니었어 
쓴다고 철썩같이 말해놓고 왜ㅡ 
 
세월이 더 더 흘러 
동묘시장 어귀에서 비슷한 그릇장을 보았다 
징이 많이 빠져 덜컹거리던 엄마의 그릇장만큼이나 낡은 물건 
 
쓸래? 하고 엄마가 물었을 때 몸 사렸던 덴 이유가 있었구나 
 
그래도 보고 또 보았다 
살살 쓰다듬어도 보았다 
 
푸른 꿈처럼 휘어져 감긴 나뭇결 
숱한 손자국을 품고도 말갛게 빛나는 유리장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와닿는 주물 손잡이 
 
아무리 비슷해도 
엄마가 만든 세월의 녹을 닮을 수 있을까 
울 엄마가 만든 녹도 아닌데 

그 녹까지 들일 수 있을까 
 

전통 그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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