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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 - 렌조 미키히코, 백광(白光)의 의미?

by 비르케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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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조 미키히코 (連城三紀彦)의 장편소설 '백광(白光)'은 어린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곱 명의 주변인물들의 엮이고 엮인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을 반전과 트릭을 통해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 속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눈여겨볼 만하다. 

백광 - 렌조 미키히코, 백광(白光)의 의미?

렌조 미키히코_백광

지난해 말 출간된 렌조 미키히코의 다른 소설을 읽으려던 참에, 어찌어찌 그 책 대신에 '백광'을 집어들었다. 렌조 미키히코는 2013년 유명을 달리한 작가다. 1948년생이고, 1977년부터 활동을 했는데, 그의 작품이 새삼 이제야 한국에서 번역된 것도 흥미롭다. 백광이라는 이 소설 또한 그의 2002년작으로, 한국에는 2022년 2월에 발행되었다.

 

오래된 작가의 문체답게 글이 묵직하다. 중간중간 화자가 여러 번 바뀌는 구도를 통해 사건을 다각도로 관찰하며 사건의 전말을 맞춰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주변인물들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안정적이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용의자 또한 바뀌어 가는데, 그때마다 그만한 동기가 짜임새 있는 그물처럼 세팅되어 있다. 이런 류의 작품에 필수인 '트릭'도 잘 활용해,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렌조 미키히코 '백광' 중에서

꿈인지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70대 노인 게이조의  두서없는 서술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야말로 치매를 앓고 있는 게이조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투영한다.

 

그는 젊었을 때 전쟁에 징집되어 한겨울 출정기차에 올랐다. 스물두 살의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그에게, 아내는 그간 못해왔던 말을 전한다. 딸이 게이조의 혈육이 아니라는 것... 떠나가는 기차 유리창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남태평양 바닷가에 내려진 그는, 그곳에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했던 살육을 저지른다. 그리고, 군인으로서가 아닌, 다분히 개인적인 혐오감에 휩싸여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죽이고 만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그때의 그 기억만은 게이조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어느 날, (게이조의 며느리) 사토코는 게이조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고 외출한다. 동생이 봐달라 부탁해 데리고 있던 조카, 나오코다. 그 시각, 사토코의 동생 유키코는 언니에게 나오코를 맡기고 어디엔가 가 있다. 그리고 유키코를 증오하는 그녀의 남편 다케히코가 그런 아내의 뒤를 캐고 있다.

 

사토코 또한 동생부부와 마찬가지로, 남편인 류스케와 사이가 썩 좋지 못하다. 그녀는 류스케와의 사이에 딸 가요를 두고 있으며, 치매를 앓고 있는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는 참한 주부다. 돌봐야 할 시아버지와 딸 가요도 있는데, 유키코가 자주 나오코를 맡기고 가는 바람에 조카까지 떠맡아야 하니 가끔은 모든 게 짜증나는 그녀다. 사건이 있던 날도 치과에 가면서 나오코까지 데려가기 힘들어 게이조에게 맡기고 외출했다가 변이 났다. 

 

사토코의 시어머니인 아키요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전처에게 상처 입은 게이조와 결혼하고나서 게이조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불교에 귀의했다. 그리고 남편의 업보까지 자신이 떠맡은 양, 게이조의 전처와 그 아이의 위패를 만들어 불단에 모셨다. 아키요가 죽은 이후에도 그 위패들은 아키요의 위패와 함께 놓여 있게 되었다. 

 

이 가족 이외에 다른 용의자는 대학생인 히라타. 히라타는 나오코가 죽던 날 유키코와 호텔에 있던 남자다. 아직 세상물정 잘 모르는 어리숙한 그가 이 사건에 개입된 이유는, 유키코의 부탁으로 나오코를 데리러 사건현장을 다녀갔기 때문이다. 

 

 

딸이 자신의 혈육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아이가 자신을 향해, "아빠!"가 아닌, "아저씨!"라 외친다. '그래, 넌 진즉에 알고 있었구나.' 미리 지레짐작을 하고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다케히코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아이가 아빠를 보자마자 아저씨라고 했던 이유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각각의 인물들이 숨기고 있던 치부가 드러나고, 미움과 혐오만이 그 자리를 메꾼다. 어린아이 하나를 두고, 부끄러운 어른들의 숨바꼭질 같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펼쳐지는 동안, 마치 그걸 알기나 한 듯 어른들의 치부를 감싸안은 어린 생명. 

 

책을 읽다 보면, 범인의 윤곽이 잡히고 그가 범인이다 확신할 무렵 다시 새로운 인물이 범죄선상에 놓이는 식으로 용의자가 바뀌어 간다. 누군가는 범인을 감싸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범인이라 여기며, 또 누군가는 범인을 특정한다. 정작 범인에 가까운 자일수록 자신의 결백이나 무혐의를 위해 장치를 해 두었거나 입을 굳게 다문다.

 

누가 어린 생명을 앗아갔든 간에, 마음속으로는 자신도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그들 모두에게 아이는 반갑지 않은 존재였기에.

 

 

표지에 있는 '백광'이 이 책의 내용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백광'이라는 말이 이 책 속에서 나온 건, '백광원석정화(白光院釋靜華)', 불단에 있던 위패에서다. 아키요가 생전에 게이조의 전처와 죽은 아이의 위패를 만들어 불단에 두었고, 나중에 아키요가 죽은 다음에는 그 위폐들 앞으로, 이 집 안주인이었던 아키요의 위패가 놓였다.

 

누군가 아키요의 위패를 만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손자국이 난 위패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게이조의 전처이거나 죽은 아이의 것인 위패가 앞으로 나와있게 된다. 그 위패에는 죽은 자에게 붙는 계명이 쓰여 있다. '백광원석정화(白光院釋靜華)'... 내용과 관련해 유추해 볼 때 아마도 죽은 아이의 것이 아닐까 싶다.

 

표지를 자세히 보면, 게이조가 전쟁 때 끌려갔던 남태평양의 어느 섬인듯한 일러스트가 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야자수, 그 아래로 꽃이 피어 있고 맨 아래쪽에 보면 소녀의 시신이 놓여 있다. 반짝이는 홀로그램으로 처리되어, 비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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