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글..

헌치백, 어느 중증 장애 여성의 솔직한 이야기

by 비르케 2024. 3. 5.
300x250
2023년 여름,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에 '이치가와 사오'라는 40대 여성의 소설 '헌치백'이 선정되었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선척적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입장을 자신만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체로 그려냈다. 

헌치백, 어느 중증 장애 여성의 솔직한 이야기

헌치백

'헌치백(hunchback)'은 속된 말로 '꼽추'라고 불리는, 척추장애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 소설은 이치가와 사오의 자전적 성격이 짙기에, 그녀의 아버지는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수상작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두 딸이 모두 '미오튜뷸러 미오퍼시'라는 선천적 난치병을 앓고 있어, 새삼 드러내고 싶지 않던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에 그랬을 것이다. 또한 부모 입장에서 반길 수만은 없는 적나라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 같다. 

 

헌치백에 등장하는 주인공 샤카는 어린 시절부터 등뼈가 휘기 시작해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장애인시설 그룹홈의 소유주로, 장애인들을 비롯해 몇몇 간병인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생활이 어렵다거나 특별히 외롭다거나 하지는 않다. 

 

부모의 유산만으로도 넉넉히 살 수 있지만, 그녀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책으로 인터넷상에서 글을 쓰며 프리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주로 수위 높은 성인물을 쓴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다 보니, 말보다는 글을 쓰는 일이 더 편한 그녀다. 

 

 

'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왼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 페이지의 긴장감이'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비치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그런 표현들마저 그녀에게는 '비장애인 우월주의'로 비쳐진다. S자로 굽은 채 고개도 잘 돌아가지 않는 그녀 입장에서는, 종이책이라는 게 그저 무게를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종이 냄새, 책장 넘기는 감촉, 왼손(우리나라 사람 기준에서는 오른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페이지의 긴장감 등을 운운하는 비장애인이 눈꼴시려울 건 당연지사일 것 같다. 

 

 

종이책은 그녀로 하여금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비틀어진 그녀의 등뼈에 부하가 많이 걸리게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종이책은,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가까이 할 수 있는 힘든 대상일 뿐이다.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자신의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가 제대로 자라지는 못 할 테니 자신이 아이를 낳기는 불가능할 것 같고, 지우는 것이나마 하고 싶은 그녀. 그 소망을 위해 그녀는 어떤 것이라도 다 내놓을 수 있다.

 

어찌 보면 무모한 호기심 내지는 객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꿈꾸는 자연스러운 소망들이 '장애'라는 걸림돌에 가려 더 간절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생전에, 그녀의 목욕만큼은 반드시 동성 간병인을 써달라는 특별 부탁이 있었지만, 때가 코로나 시국이라서 인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결국 여자 간병인 대신 남자인 다나카 씨가 온다. 그리고 그에게, 중절과 관련된 도발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생산성 없는 장애인들에게 사회보장을 빨아먹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분들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조금쯤 체증이 내려가지 않을까?"

상속인이 없기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재산이 모두 국고로 들어간다며,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보장을 맘에 안 들어하는 사람들을 향해 건네는 언사가 자못 냉소적이다. 장애를 비관한다기보다 뭔가 억울한듯한, 그녀만의 비꼬는 듯 씁쓸한 유머가 인상적이다. 

 

장애에 관련된 작품들은 많아도 장애인이 직접 자신의 입장에서 쓴 글은 대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만장일치로 큰 상을 받게 되었겠지만, 비장애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평범한 일상에의 간절함'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아끼게 된다.

 

장애라는 고통은 생의 마지막에라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겠지만, 생의 시작부터 장애라... 거기에다 대고 비장애인 기준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읽으면서 그냥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이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