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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시간을 거슬러

벼룩시장에서 얻은 그림, 비 내린 물랑루즈

by 비르케 2021.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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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에는 싸고 좋은 물건과 싸고 허름한 물건이 섞여 있다. 

주인을 제대로만 만나면 더 좋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물건들도 즐비하다.

사람과 물건이 엮이는 곳, 물건과 가격이 합의점을 찾는 곳, 벼룩시장이 좋은 이유다. 

 

 

벼룩시장에서 얻은 그림, 비 내린 물랑루즈

 

벼룩시장은 보물찾기 같은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특히나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제값 다 주고 사기에 아까운 물건들을 반도 안 되는 가격에 얻을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다. 생각지도 않게 로열 홈세트나 럭셔리한 장식품들을 만나면, 이때다 하고 한아름 들고 와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가난한 학생 신분으로는 분에 넘치는 물건들을 그렇듯 벼룩시장을 통해 만났다.

 

한 번은 어느 화가의 작품을 구경하다가 그림을 얻은 적도 있다. 독일 벼룩시장에서였다. 그림 속에 비 내리는 거리가 인상적이라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화가가 맘에 드냐고 물었다. 비 내린 거리와 사람들과 빨간 풍차가 멋있다고 대답했다. 그림 속에 물랑루즈라고 쓰여 있는데도 그때는 그곳이 물랑루즈인 줄도 몰랐다.

 

 

 

화가는 대뜸 내게 그 그림을 가지라고 했다. 이유도 없이 그냥 받기는 그렇고 싸게 주면 사고 싶었다. 기숙사 내 방에 걸어두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한번, 이건 니꺼라고, 그냥 가져가라는 것이다. 어차피 얼룩이 있어서 팔기는 힘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려고 놔둔 그림이라 했다. 그림에는 아주 희미한 얼룩이 있었다. 그렇게 그날 물랑루즈가 있는 그림과 에펠탑이 있는 그림을 그 화가에게서 두 개나 받았다.  

 

 

물랭루즈
90년대 말 벼룩시장에서 얻은 그림들 - 물랑루주, 에펠탑

 

물랑루즈와 에펠탑 그림은 한동안 방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거처를 옮길 때도 항상 따라다녔다. 가을만 되면 독일에 있던 때 생각이 나서 가끔 가을병이 도지곤 했는데, 그때 이 그림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독일은 10월만 돼도 몹시 추워진다. 비가 자주 내리고 스산하고 가끔은 살을 에이는 날도 많다. 마치 이 그림 속 거리처럼 바닥도 물에 젖어있다. 습기를 머금은 낙엽들은 더 짙은 색으로 우수수 바람에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 그게 내게는 그리 황량한 풍경이 아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 그 느낌이 좋아서만도 아닐 텐데 이유를 알 수 없게도 그 차가운 거리가 그리워질 때가 가끔 있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물랑루즈, 에펠탑

 

물랑루즈 그림에 있던 얼룩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 진한 색으로 변해갔다.

그림에 세월이, 그 위에 또 세월이 덧입혀졌다.

 

두툼한 MDF 위에 단단히 붙어 있던 그림 주변으로는 종이가 까여나가는 중이다.

그렇다고 유리 액자에 끼우기는 싫다.

 

그림도 만질 수 있어야 좋다.

가끔 이 그림을 쓰다듬으면 내 몸에도 비가 스미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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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에서 만난 화가에게서 이 그림을 받은 게 1990년대 말이고, 그로부터 다시 십 년쯤 지났을 때 독일의 벼룩시장 몇 군데를 더 가게 되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독일의 강산은 많이 안 변한다. 다만 사람은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는 벼룩시장에 딱 그 가격만큼의 물건만이 존재했다. 심지어 기업 느낌이 나는 상인들도 있었고, 싼 물건들은 1 유로샵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도자기 파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가 이런 소리를 듣기도 했다. 

"중국에서 이미테이션 나오는 거니?"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평소에 도자기 그릇들을 좋아해서 무심코 찍었던 건데, 중국에서 똑같이 베껴 나오는 상품들에 민감한 주인장이 자신의 상품을 찍는데 기분이 상해 시니컬하게 던진 한 마디였다.

 

그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 벼룩시장 같은 그런 시장은 없는 거라고... 다들 가격이 오픈되어 있고, 중고가도 표준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벼룩이 아니고 이제는 또 무엇과 비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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