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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 브레히트 산문

by 비르케 202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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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산문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을 읽는다. 브레히트는 문학의 여러 장르에 걸쳐 다작을 했지만 그나마 산문은 손에 꼽는다.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은 '코이너'라는 인물을 통해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비틀어보는 아포리즘 성향의, 가볍지만 함축적인 산문이다.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 브레히트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일단 책의 제목이 거창해서 원제는 뭘까 찾아보았다. 'Geschichten vom Herrn Keuner', 즉 '코이너 씨 이야기(역사)' 정도인데, 책에는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이 제목이 붙은 이력에 대해서는 책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 글의 주인공 '코이너(Keuner)'라는 인물이 브레히트 작품에 등장할 즈음은 나치가 득세하기 시작했던 때다. 브레히트가 자신의 시에서 히틀러를 대놓고 '칠쟁이(세상을 맘대로 색칠함)', '엉터리 화가' 등으로 표현하며 반나치 성향을 드러내던 때였으니,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코이너'라는 인물을 통해서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_재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이처럼, 짧지만 강하게 핵심을 찌르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 책을 이끄는 '코이너 씨'는 때로는 'K 씨'로도 표기되는데, 독일 이름 '코이너(Keuner)'는 독일어 '아무도 없음', '아무도 아님'을 뜻하는 'Keiner'와 알파벳 하나 차이라서, 이름에서 주는 느낌이 우리나라의 '아무개'와 비슷하다. 옮긴이 또한 이런 이름에 대해서는 'Keiner'와 연관 지었지만, 왜 이런 이름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브레히트 맘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 했던 사람을 봤을 때, 우리도 흔히, "여전하시네요.",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라고 인사할 때가 있다. 그런 말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K 씨에게는 그 말이 탄식할 일이며 얼굴 창백해지게 하는 표현이다. 변한 게 없다는 말이 K 씨에게는 충격인 것이다.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_최고 실력자의 수고

 

"무슨 일을 하시는지요?"라는 물음에 K 씨는 "다음번 실수를 저지르려 수고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원어를 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독일어로 무슨 일을 하느냐는 "Was machen Sie?"라는 질문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실제로 지금 뭐하냐는 현재 행동에 대한 물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직업을 묻는 말이다.

 

분위기상 직업을 묻는 말인데, 여기다 대고 현재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답한다. 대답 자체도 엉뚱한데, 거기에 다음번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뭔가 하는 것도 아니고, 실수를 저지르려 수고하는 중이라 답하니 아이러니하다. 브레히트가 코이너 씨를 통해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일일이 해명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_무기력한 소년

 

'무기력한 소년'을 읽다가도 허가 찔린다. 은화 두 개를 들고 있다가 그중 하나를 빼앗기고 울고 있는 소년에게, K 씨는 '도와달라'고 외치지 그랬냐고 말한다. 소년이 '소리 질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소년의 대화가 이어진다.

 

"더 크게 외칠 수는 없었니?"

"그렇게는 못해요"

 

다정하게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K 씨를 보며 소년은 자신의 은화를 되찾을 희망에 부풀었지만, K 씨는 미소 지으며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남은 은화도 내놓으렴."

 

 

 

히틀러는 독일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독일은 천문학적인 배상금으로 인해 빈곤의 덫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고, 이를 극복할 유일한 희망으로 비친 이가 히틀러였다. 그런 인물을 지도자로 고른 것도 힘없는 민중이었고, 그 지도자로 인해 저주스러운 고통을 받았던 것도 그 민중이었다. 

 

제대로 행동하지 않아 그런 고통을 겪었다면 다음 행동은 신중해야 함을 느끼게 해 준다. 나약함은 결코 선의가 아님을, 나약함을 구제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자신임을 느끼게도 해준다. 짧은 글임에도 뇌리를 강타하는 강렬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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