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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속옷 22개, 그 외엔 모든 게 부족한 여행이었지만..

by 비르케 2009.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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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짐 꾸리는 데도 이력이 붙는 것 같습니다. 목적지에 딱 맞춰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면서도 웬만한 물건은 빠뜨리는 법이 없으니까요. 저도 짐 꾸리는 데는 이골이 났지만, 여행을 위해 꾸리는 짐만큼은 늘 어렵더군요.  

이번 여름, 초등 4학년인 큰애를 처음으로 캠프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3주간이나 되는 긴 여행기간을 대체 어떤 식으로 준비해 보낼 것인지 고민은 많았지만, 작은 것 하나까지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세면도구같은 자잘한 물건들부터 침구며 수건들(얼굴수건, 목욕수건, 때수건)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던 준비물 목록이 있었습니다. 그 목록 속에 실소를 금치 못 하게 하던 부분, '속옷 22개'.... 3주라고 딱 맞춰 속옷도 22개를 가져오라니, 우습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그 긴 기간동안 빨래는 할 수가 없다더군요. 

그렇듯 작은 부분까지 신경쓴 듯한 목록이 있었기에, 그게 준비할 물건 다인줄 알았는데, 아이가 돌아오고 나서 간간이 하는 이야기 속에 '여행지에서의 부족함'의 실상이 하나씩 드러나더군요.

홈페이지에 올라있던 사진입니다.

이 곳 쥘트섬의 모래알,
입자가 희고 고우며 엄청
부드럽습니다. 
하얗게 반짝거리는 게 너무도 예쁜데, 대신 신발들이며
가방들, 옷가지들,
털어내고 빨래하느라
덕분에 힘 꽤나 들었습니다. 

이 고운 모래알들이
너무도 입자가 곱다 못해,
거센 파도에 해마다 마구 
유실되어가고 있다니
애석한 느낌도 들구요...   


"엄마, 독일은 카메라가 싼가요? 애들이 거의 카메라를 가져왔어요."

이야기 하다보니 일회용 카메라더군요. 3주 동안 많은 이야기들이 쌓였을 텐데, 독일에서는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겨우 대문에 걸린 사진 몇 장속에 저희집 아이는 어디에도 없으니, 참... 안 챙겨보내서 가장 후회되는 물건이었습니다. 

"엄마, OO는 자기 엄마가 편지 보내줄 때마다 봉투에 2유로씩 돈이 들어 있었어요."
이 또한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그 OO라는 친구와 인사를 나누다, 그애가 "나, 우리 아빠가 2유로 줬는데, 이걸로 사고 싶은 거 사라고 해서 뭘 살까 고민중이야."하는 걸 보며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말하더군요. 편지봉투에 그저 편지만 써 보낼 줄 알았던 이 엄마는 순간 당황스럽더군요. 떠날 때 좀더 넉넉히 용돈을 들려 보내려 했건만, 정작 딱 잘라, 그만하면 됐다고 하고 떠났던 녀석이었으니까요.  

"에이~ 물안경도 있었는데, 이거 가져갔으면 물놀이 더 신나게 했을걸..."
얼굴이 반이나 덮히는 커다란 수경과 입에 물고 잠수할 수 있는 튜브 또한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섬인데다, 숙소가 바로 바다 옆이라, 심심하면 나가 놀던 곳이 바다였거든요.  

그러더니 오늘은 어느 길목에서 그래피티를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또 한 마디 합니다.
"캠프때 그라피티(그래피티의 독일 발음) 그리는 형이 있었는데요, 그 형은 그라피티를 5년이나 했대요. 사진으로 다 찍어놓았던 거 가져와서 모두에게 보여줬어요."
별걸 다 가져오나 보더군요. 그 많은 짐과 함께 기타를 둘러메고 온 아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북해의 섬, 쥘트는 화산활동으로 인해 바다돌들도 화성암이 주를 이룬다고 합니다. 화성암 중에 가장
판별이 쉬운 현무암(검정색)도 오랜 기간동안 파도에 씻겨서 거친 부분이 없이 둥그런 모양새입니다. 


편지봉투에 편지만 넣어보낼 줄 알았던 이 엄마가, 이러한 '여행지에서의 부족함'에 대해 한 일이 그래도 하나 있긴 있었습니다. 여행지로 띄운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었지요. 
"부족한 게 많은 여행일 테지만, 부족한 게 많을수록 가끔은 더 재미있어 진단다."

사실, 여행 짐 규정을 곧이곧대로 지켜서 25킬로그램이 안 넘어가게 챙기느라 애를 먹었건만, 다음날 어마어마한 다른 아이들의 짐을 보고 난 후, 부족한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거든요.

늘 '모험이 좋다.'고 말하는 녀석이라, 엄마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으리라 여기면서도, 어쩐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부족한 게 많은 여행이 정말로 더 즐거울 수 있을까?'

그건 오히려 3주간 여행을 다녀온 아이가 제게 답을 해줘야 할 문제 같아 직접 물어보니, 금새 또 환한 표정으로 그때를 그리워 합니다. 여행지에서의 부족함이란, 완전한 무(無)가 아니고선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나 봅니다. 어제부터 오랜 방학을 마치고 다시 학교에 복귀한 바, 올해 여름은 녀석에게 평생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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