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많은 독일 유학생들이 그렇듯, 나 또한 한국으로 귀국하는 어느 분에게서 쓰던 몇 가지를 중고로 구입했다. 그 속에는 브리타 정수기도 있었다.
나 만큼이나 가난한 유학생 처지였던 그 분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필터는 자주 살 필요 없어요. 석회는 식초에 녹으니까 식초에 담궜다가 다시 쓰면 돼."
그때까지 한국에서 브리타 정수기를 본 적이 없던 나는, 브리타의 용도를 석회만을 거르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실제로 그 분의 말에 따라 식초에 담궈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다지 효과있는 방법은 아니거니와, 국이라도 끓일라 치면 석회때문에 국물을 뜨기도 전부터 식감이 사라져 버리고, 여유로운 티타임마저도 심란케 하곤 하길래, 아무리 힘들어도 브리타 필터값만은 아끼지 말자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한국에 돌아가니, 약국이며 어디며 브리타가 흔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다른 정수기는 못 사도 줄곧 브리타만은 쓰게 되었다. 그렇게 브리타만을 정수기로 쓴 게 세월따라 십여년이 지나갔다.
작년에 독일에 다시 와서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또 다시 브리타 정수기를 사러 돌아다닌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에 와서 본 브리타는 어쩐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독일 물건들을 잘 보면 알겠지만, 디자인이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예전 모델 새로 나온 모델
독일에도 현재 두 가지 모델이 공존하고 있다. 해묵은 물건들마저도 아끼는 독일 사람들 특성상, 예전 필터를 사용하는 주전자 용기를 선뜻 버리지 않기 때문에, 예전 필터를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쯤 되니 필터와 함께 주전자까지 묶어서 주는 행사가 마트에는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위의 흰색 주전자도 있건만, 필터 여섯개 들이를 사면 주전자가 선물이길래, 이왕이면 같은 값에 주전자가 끼워진 상품을 집어들었다. 어쩐지 내 단촐한 주방에 빨강은 좀 난감하기도 하고 그렇다. 쓰고 있던 통이 아직은 쓸만하니 일단 선반에 보관할 참이다.
우리나라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니, 새 모델이 역시나 발빠르게 들어와 있다. 하지만 가격은 참 비싸다.(첫번째 사진에서의 가격은 필터 3개 포함) 하긴 브리타의 생산지 가격하고 같을 순 없지 않겠는가.
왼쪽 2개가 신모델과 필터이고, 오른쪽 사진 두개는 구모델과 그 필터이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두 모델이 저렇게 많은 가격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모델에는 4주 기준으로 새 필터를 갈게끔 체크기가 부착되어 있다.
우리집은 마시는 물은 따로 사서 마시기에, 브리타 정수기 물은 음식을 조리하거나 차를 마실 때만 쓴다. 물맛 자체가 다른지, 독일에서 브리타 정수기에 거른 물은 약간 비린내가 나는 데다, 독일에 온 이상 탄산이 들어 있는 광천수가 내 입맛에는 더 맞기 때문이다.
마실 물을 따로 사 마시는 데도 4주 가량이 지나면 석회 성분이 나오기 시작한다. 석회가 어떻기에 그리도 야단이냐고 하실 분들을 위해 마련한 사진, 4주 정도가 지난 필터에서 물을 받아 만든 커피이다.
새 필터를 사기 전인데, 커피는 마셔야겠고..., 해서 한 번 이렇게도 마셔봤다.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벌써 컵 언저리에 석회 자국이 남았다.
<석회가 가득 떠 있는 커피, 맛도 텁텁하다>
<새 필터로 거른 물에 만든 커피>
십여년 전, 어느 일본인 친구는 탄산이 안 들어간 물을 사서, 그걸로 요리도 하고 마시고 했었다. 물값이 과연 얼마나 들었을지, 또 어깨에 그 많은 물을 짊어지고 다니려면 얼마나 수고스러웠을지... 같은 독일이라도 석회가 심하지 않은 곳은 이런 현상이 없으니, 참 재미있지 않을 수 없다.
마시는 물은 그렇다 치고, 빨래는... 새로 빤 옷을 입어도 어딘지 눅눅함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또 섬유에 남아 있는 석회 성분 때문일 것이다. 다행이 그 또한 서서히 적응되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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