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학교 가던 길, 그 어린 눈에 살굿빛 화려한 꽃이 들어왔다. 으리으리한 부잣집의 담벼락에, 마치 벽을 타고 흘러내리듯 피어 있던 그 꽃은, 잠시 내린 비에 촉촉히 젖은 채 꽃잎 몇 장을 바닥에 떨군 채였다. 가만히 다가가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당시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것만 같은 꽃이었다.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길 모퉁이에서 다시 그 꽃을 보았다. 강렬하게 뇌리에 와 박혀있던 어린 시절 어느 날의 잔상을 떠올리며 여름 한 철 빙긋이 미소 지으며 그 곁을 지나 학교에 다니곤 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 드디어 그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능소화"
살굿빛의 소담한 꽃, 어린 나를 멈추게 했던, 대학생이던 나를 미소 짓게 했던, 그 꽃을 오늘 다시 우연히 보았다. 어느 음식점 입구에서였다. 음식점을 향하는 계단은 따로 나 있었지만, 발길은 나도 모르게 능소화 옆으로 가고 있었다. 여름의 강렬한 햇살 속에서도 청아하게 피어난 능소화... 화려한 꽃봉오리도, 유연하게 꺾이는 그 줄기도 참 좋다. 사람도 힘이 강한 다부진 사람이 있고, 몸짓이 유연한 나긋나긋한 사람이 있다. 다 나름의 멋이 있듯이, 능소화의 유연한 흐드러짐이 나는 참 맘에 든다.
사진 속 저 호수를 바라보며 파스타를 먹을 생각에 기껏 차를 달려 갔더니, 창가 쪽으로는 이미 만석이었다. 꽤 알아준다는 파스타집인데, 사람 오가는 통로는 너무 답답해 보여 그냥 다음에 다시 오겠노라 양해를 구하고 나와버렸다. 다른 때였더라면 웬만하면 그냥 먹고 나왔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벼르고 간 날이었다. 호수를 바라보며 밥을 먹겠노라고... 그런데, 사실 내가 그 음식점을 나온 이유는 호수가 안 보이는 것 말고도 또 있었다. 입구에서 발견하고 그렇게도 환호해 마지않던 능소화도 통로쪽에서는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호수와 능소화를 둘 다 놓치고 밥만 먹고 나오긴 싫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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