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카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타들어 가듯 아픈 마음을 감은 눈꺼풀 뒤에 숨겼다. 나이가 들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물은 대부분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노년의 기록,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원제: Tranorna flyger söderut (두루미들이 남쪽으로 날아갔다)
리사 리드센/ 북파머스/ 2024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 수상작
나는 상속권을 박탈해 그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는 식스텐을 데려가는 것이 다 나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이 숲에 가서는 안 되고, 식스텐 같은 개들은 시골길을 한번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더 긴 산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도 했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이 책은 기력이 다한 노인 보가 아들 한스에 대해 느끼는 배신과 실망 가득한 혼잣말에서 시작된다. 애지중지 기른 하나뿐인 아들을, 89세의 거동조차 불편한 노인이 그토록 증오하게 된 이유는 그가 자신의 뜻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굴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치매로 요양원에 가고 난 이후, 보는 줄곧 그의 개 식스텐과 함께 했다. 그런데 한스는 식스텐을 그에게서 데려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보가 너무 늙어 식스텐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식스텐 & 부르테르
보는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정작 아들 앞에 침묵한다.
그의 의식 속에는 어릴 적 기르던 개 부르테르가 떠오른다. 항상 곁에 있어주고 자신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개일지라도 오히려 형이라 부르고 싶던 존재였는데, 그런 부르테르가 늙어 병이 들자 아버지(보는 그를 증오해 '노인'이라고만 칭한다)는 여느 때처럼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갔다가 총으로 쏴 죽이고 묻어버렸다.
그 장면을 모르게 지켜보고 홀로 눈물을 흘리던 보는 그때의 그 상처가, 식스텐을 잃게 될 두려움과 함께 다시 한번 마음을 짓누른다.
프레드리카
당신의 체취는 이제 예전과 같지 않다. 그들이 비누와 크림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치매는 당신의 뇌만 바꾸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보의 아내 프레드리카가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가던 날, 보는 아내의 스카프를 유리병에 담아 두었다. 아내의 냄새가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녀에게서는 이제껏 알던 그녀의 냄새가 아닌 전혀 낯선 냄새가 난다. 그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보는 가끔씩 유리병뚜껑을 열어 아내의 스카프에서 아내의 냄새를 맡아보지만 점점 뚜껑을 여는 일도 힘에 부친다.
한스
한스에게는 아버지와 연관된 좋은 기억들이 많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녔고, 자신의 딸 엘리노르가 커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다. 엘리노르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하자 두 사람은 그때로 돌아간 듯 서로 웃는다.
한스에게는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가 있고 노쇄한 아버지를 대신해 일일이 챙겨야 할 일도 많다. 당연히 그는 직장인이고 업무 또한 과중한 편이다.
한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부모를 모시기도 버거운데 반려견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렇다고 요양보호사들에게 개의 산책까지 부탁을 하자니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기에 아버지에게 일방적이다시피 식스텐과의 이별을 강요하게 되었다. 식스텐이 어쨌든 용변을 보려면 하루 한 번 산책은 필수인데, 보는 이제 개를 데리고 집밖으로 멀리 나가는 일도 하기 힘든 상황에 빠져 있다.
투레
보의 오랜 친구지만 젊어서는 그와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친구일지라도 모든 걸 오픈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서로 왕래가 어려우니 투레는 보와 통화를 할 때마다 마치 두 사람이 어느 카페에 앉아있는 듯 차와 과자를 옆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투레가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보는 자신도 미처 한스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꼭 하고 싶었다.
두루미
이 책의 제목은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이다. 그런데 제목과 책의 내용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원제 < Tranorna flyger söderut >에서의 Tranorna는 스웨덴어도 두루미들(복수형)을 지칭하는 단어라 한다. flyger는 flyga(날다)의 과거형. 그러니 Tranorna flyger söderut는 '두루미들이 남쪽으로 날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새'가 '두루미'로 바뀌고 나니 비로소 이 책의 내용과 제목이 연결 지어졌다.
트럼펫 소리를 연상시키는 새 울음소리 때문에 생각이 달아났다. 머리 위로 두루미 한 쌍이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고 있었다. 나는 발을 멈추고 그들을 눈으로 따라갔다. 두루미는 힘찬 날갯짓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두루미들이 남쪽으로 날아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날 것이라 다짐했다.
두루미는 이 책에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그 이상 등장했을 수도 있다. 처음 부분은 보의 젊은 시절, 그가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날 생각에 젖어있던 때 등장한다. 그토록 증오하던 자신의 아버지 곁을 떠나 새로운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그는 두루미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고향을 뜨고자 했다.
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기 위해 두루미들이 모여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보의 인생에서 가장 희망찼던 시절에 등장했던 두루미는 책의 끝부분에도 등장한다. 보는 두루미들이 남쪽으로 떠나기 위해 모여드는 소리를 듣는다. 마음의 날개를 펴고 그들과 함께 날아올랐을 것만 같은 결말 부분이다.
2024년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
리사 리드선의 책 <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은 89세 노인의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정신 상태와 그에 반해 너무도 깔끔하고 명확한 요양보호사들의 메모들로 이뤄진 책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며, 점차 생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는 노인의 심적인 변화를 때로는 독백체로, 때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대화하듯 써내려 갔다.
한 세대가 저물며 그들의 공간에는 예전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일상이 펼쳐지고, 자신의 집을 새로운 이들이 들락거리고, 자신의 일을 타인이 결정한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은 그게 아닌데도 스스로 무력해질 수 없는 노년의 일상을 간접체험해 보았다. 자신의 의사를 무시한 채 물건들을 맘대로 처분하고 개를 데려간 아들에게 분노로 얼룩졌던 감정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점차 받아들여지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며 노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사랑하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잃고, 머릿속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지막 인사를 갈구하는데도 말은 나오지 않고 숨만 몰아쉬어야 하는 그 불가역적인 답답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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