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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멸치가 무서워!!

by 비르케 2009.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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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엄마, 이 멸치 너무 무서워!"
김치 담을 배추를 간하고 나서 된장국을 끓이려고 시들한 배춧잎들을 손보고 있는데, 작은애가 냅다 소리를 지릅니다. 된장국을 끓이려고 내놓은 멸치들의 관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더니만, 그 중 한 멸치를 두고 비명을 지르고 만 것입니다. 

무서우신가요? 전혀 아니겠죠? 특히 주부들이라면 생선 조리도 하는데, 이깟 멸치가 뭐가 무섭겠어요. 

하긴 저도 한국에 있을 때, 생선을 사려면 친절하게 머리도 떼주고 용도별로 잘라주기까지 하던 마트를 주로 이용했답니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생선의 눈은 차마 잘 봐지지가 않더라구요.

멸치가 무서워 생난리를 떠는 모습을 보노라니 예전 독일에 있을 때 함께 살던 친구가 떠오릅니다.   
십여년 전에 저는 독일 친구들과 집 하나를 같이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아는 친구들은 아니었고, 그들이 세를 사는 집에 방이 하나 비어 제가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집 하나를 통째로 얻은 후 방을 나눠 사용하면 방값이 싸지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학생들끼리 이런 식으로 많이 방을 함께 얻기도 합니다. 이런 주거 형태를 독일에서 '베게(WG: Wohngemeinschaft)' 라고 부르지요. 각자의 방이 있고, 화장실, 부엌, 발코니 등의 공간을 공유하는 식입니다.

어느 날, 함께 살던 친구 중 하나가 제 방 문을 두드리더군요. 문을 여니 상기된 채 서 있던 그 친구가 어서 주방으로 가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아까의 그 녀석, 바로 그 '멸치' 한 마리가 떡~ 하니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사는 친구들이 모두 외출하고 없던 차에, 혼자 수제비를 끓여 맛있게 먹었는데, 뒤늦게 돌아온 한 친구에게 들켜버리고 만 것이죠. 사실 독일애들과 함께 살면서 한국음식만 자주 해먹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하고, 또 만들려면 늘 2, 3인분은 족히 만들어야 맛이라도 보라고 들이밀 수 있으니까요. 그거야 그렇다 치고, 멸치 한 마리를 보고 벌벌 떠는 게 너무 웃겨서, 얼른 주워 그 친구 얼굴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니 무서워 난리도 아니더군요. 덩치는 저보다 한참이나 큰 친구가 말입니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 보아도 참 재미있는 기억입니다. 

독일에서 그처럼 생선을 무서워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다가 북쪽에만 있기 때문에, 북독 지방인 함부르크 등지의 도시에서는 생선 구경을 그래도 자주 하지만, 남독 쪽으로 내려오면 사정이 많이 달라집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생선은 그저 다 처리되어 깡통이나 진공 포장된 게 다일 정도입니다. 
그나마 이번에 십여년 만에 독일에 와 보니, 분위기가 많이 나아졌음이 느껴집니다. 가끔 이런저런 행사에 고등어 그릴(꼬챙이로 끼워서 굽고 있더군요)도 보이고, 진공포장일 망정 그것도 예전보다는 종류가 훨씬 더 다양해졌으니까요.


생선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좀 무서운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생선 축에도 못 낀다는 멸치를 두고 벌벌 떠는 제 아들이나 예전 그 독일 친구나.. ㅎㅎ
하긴 저도 몇년전까진 물오징어도 못 만졌는데, 이제는 내장 꺼내고 쭈욱쭉 껍데기 벗기는 데 달인이 따로 없습니다. 오징어... 누가 주기만 하면 맛있게 만들 수 있는데, 이 곳엔 오징어가 없으니 그게 문제지요. '오징어'라는 이름을 사칭한, 오징어 동생에 동생에 동생같은 쬐그만 냉동 오징어 말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사진에 등장한 녀석도 멸치를 사칭한 디포리네요. 디포리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시고, 오늘 이야기가 '멸치'에 가깝다 보니, 집에 있는 디포리 사진을 올리고도 그냥 지나가려다 결국 한마디 하게 됩니다. 국물멸치 보내달라 했더니만, 동생이 부쳐준 거랍니다. 동생 말로는 이게 밴뎅이 말린 걸로, 멸치보단 몸값(?)이 더 비싸다고 하더군요. 국물맛도 더 좋다는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 무섭다던 멸치, 아니 디포리로 국물을 낸 배추된장국에다 저녁을 잘 먹고, 지금 아이들은 꿈나라에 가 있습니다. 무서워 난리를 쳤으니 오늘밤에는 아이들 꿈 속에 악당으로 멸치가 등장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도 이만 포스팅을 마치고 꿈나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멸치를 만나게 되거든 제가 정의의 사도라도 되어야 할 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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