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또 하루

크리스마스 이브에..

by 비르케 2008. 12. 24.
300x250


크리스마스 이브다.
며칠간 길이 꽉 막히고 버스가 노선을 바꾸기도 하면서
우리의 명절 만큼이나 부산한 크리스마스 이동이 시작되었지만,
오늘 오후가 되니 길에 한산함만이 감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2시 이후로 가게들이 다 문을 닫는다.
물론 크리스마스 장도 마찬가지, 바로 어제가 마지막 날이었다.

다행이도 가게에 친절하게 붙어 있던 안내문 덕분에
오늘 2시 이후로 모든 상가가 문을 닫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놔서
이것저것 사다가, 냉장고에 한 가득 비축을 해둘 수 있었다.

모레까지 이틀하고도 반나절,
아니, 토요일이 샌드위치로 끼어 있어서
아마도 일요일까진 이 정적이 계속될 것이다.
아니, 그 또한 아닌 것이,
학교나 직장들에선 2주 이상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이미 시작되어서
텅 빈 도시같은 느낌이란 생각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위의 사진은 애들학교의 이번 크리스마스 방학식날의 공연 모습이다.) 

이런 대이동 철에도
우리의 명절과 마찬가지로
집에 가지 않는 독일인들도 많은 듯 하다.
길 가다 자주 마주치게 되어 안면을 익힌 어느 독일인이
크리스마스에 집에 있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자신도 집에서 자기 친구들, 남편 친구들 불러서 놀거라 했다.

"고향에 안 가고?" 하며 묻는 내게, 그녀는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내 남편도 어머님이 계모라 자주는 안 가." 라고...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명절에 고향에 자주 내려가던 사람은 아니었다. 
나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봐도
밀리는 명절 대신 
그 전 주말에 미리 고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명절이란 우리에게
어릴 적 향수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즐거운 날이지만,
더러는 명절에 불미스런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또 더러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싸움도 오가기도 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 인가 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이혼 가정 또한 많아지다 보니,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독일에도
옛날 같은, 또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할머니댁'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촛불같은 안온한 고향을 그리며 찾아가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게 요즘의 명절이다.

방금 전 텔레비전에서 코미디 프로 하나를 보았다. 
먼 곳에 사는 아들이 크리스마스를 기해 고향에 온다고 한다.
두 노부부는 갑자기 부산해진다.
아들에게 예전의 포근한 고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데서 부터 두 사람의 소리없는 전쟁은 시작된다.
부산을 떨다보니, 뭔가가 발에 밟혀 깨지고, 
서랍이 안 열려 억지로 여니 바닥이 와장창...
씽크대 문도 덜렁덜렁...

드디어 아들이 오지만 세 사람은 밥만 먹는다.
아버지가 접시를 나이프로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좀 먹으라 말 하고,
아버지는 언성을 높히다가, 옆에 있던 초인지 뭔지를 어머니 쪽으로 넘어뜨리고...
식사하다 일어서서, 줍고, 문질러대는 어머니..
그럼에도 분위기가 깨질 것을 우려한 어머니는
"애야, 별 일 아니란다." 하며 수습하려 애를 쓴다.

밥 숟가락을 막 뺀 아들과 남편에게
어서 거실로 가자고 재촉하는 어머니..
아직 시간은 많지 않느냐 말하는 아들...
어서 하고 자야지 하는 어머니..
어서 하고 자자는 말에 어이없어 하는 아들...

가족은 어쨌거나 거실로 가서 선물들을 펴본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받은 앞치마(부엌일 좀 하라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받은 압력솥(좋아하는 척 하다가 그냥 내동댕이친다),
아들이 받은 선물은 좀 그래도 낫다. 목도리..
아들에게 아버지가 받은 건
분데스리가(독일 축구대표팀) 역사가 수록된 두툼한 책,
이게 뭐냐 묻다가 결국 '쫘악~'찢어지는 책...
그런 가운데 어머니만이 
아들에게 받은 브로치를 맘에 들어 한다.
결국 또 바닥에 널린 포장지에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샴페인은 맛이 어째 이상해서 분위기를 팍~
그 와중에 트리 장식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게 되고,
결국 트리가 거실바닥에 거꾸러지는 사태까지...

웃으며 본 코미디 프로였지만,
(코미디프로라곤 하지만 연기자들은 웃음없이 진지했다. 그래서 더 웃겼다는..),
어찌 보면 현재의 우리 명절이나 이들의 크리스마스를
나름대로 잘 대변해 준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홀로 집에'같은 영화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크리스마스만 되면 가족영화가 대세를 장악하는 이유도,
바로 사람들이 꿈꾸는 고향이나 가족을
그런 영화들이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고향...
앞으로는 그런 곳이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돌아갈 고향이 없거나,
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향도 많아지는 요즘이다.

"고향같은 게 어디 있어!" 하던 그 독일인처럼,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잃거나 등지고 살아가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각박함이
문득 내게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든다.

몇 년동안 보관해 놓고 철마다 다시 사용하던 귀하디 귀한 장식들...
지하나 다락방에서 가지고 와서
일년 묵은 먼지를 털어낸 다음, 트리에 달곤 하던...

손으로 일일이 깎고 다듬어 만든 것들이기에
더 값비싸고 소중했던 그 장식들도,
어디에서 밀려왔는지 모를
본드가 더덕더덕 붙은 싸구려 장식들에 밀려
한 철 쓰고 쓰레기통에 버려도 될 물건들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뭐든 버려도 될 만큼 풍성해진 요즘이지만
어쩐지 고향까지 저버리기는 싫은
그러한 간절함이 내 가슴을 두드린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어릴적 고향을 떠올릴 수는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란...
과연 어디일까?
이사만 해도 몇 번, 도시가 바뀐 적도 몇 번..
그 중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이라 부를 법한 곳은,
그 곳은 과연 어디일까...

 

반응형

'하루 또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년 마지막 날..  (0) 2008.12.31
장미와 빤따롱/ 검은 고양이 네로  (2) 2008.12.27
교과서 빌려주는 나라  (0) 2008.11.03
Tagliatelle 볶음국수  (0) 2008.10.31
첫눈 내린 날에..  (0) 2008.10.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