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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by 비르케 2018.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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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던 책을 우연히 찾게 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업은 애기 삼년 찾는다고, 책꽂이에 멀쩡히 꽂혀 있던 책을 몇 년간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내심 아쉬운 마음만 품고 있었다.

 

이 책을 그렇게나 찾지 못 했던 이유는, 책꽂이에서 바로 보이는 책 모서리 부분이 노란 색에서 흰색 가까운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중고서점에 책을 팔기도 하고 더러는 필요한 사람을 주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대학 때 손때 묻은 책들은 그렇게 쉽게 떠나보내지도, 떠나보내고 잊어버리는 일도 없다. 이 책만 해도 노란색 표지에, 베레모를 쓴 젊은 브레히트의 모습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문득 생각이 미칠 때마다 찾아보길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시집의 특성상 얇고 작아서 다른 책들 사이에 끼어 있어 찾지 못 했던 것인데, 얼마 전 이 책에 관한 포스팅을 한 바 있어, 그때 책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보게 된 것이, 그나마도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몇 년 만에 발견한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표지와 동명(同名)의 시가 수록된 페이지의 모습이다. 이 책은 1987년 출간된 책으로, 당시 판매가는 2,200원이라 적혀 있다. 예전 번역본이라서 아무래도 표현들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원제는 'Ich, der Überlebende' 다. 직역하자면, '나, 살아남은 자' 또는 기껏해야 '살아남은 나' 정도로 해석된다. 어느 구절에도 슬프다고 쓴 곳은 없다. 전쟁이 끝난 다음 슬픔을 논할 자가 과연 있었을까. 특히나 두 번의 세계대전은 인간이 그 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만큼 참혹한 전쟁이었으니, 살아남은 사람이 '나만 특별히 슬프다'고 할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된다. 시의 원본과 당시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나, 살아남은 자

 

물론 나도 알아, 그게 행운이었다는 것을.

내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말야

지난밤 꿈에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지

"독한 놈이 살아남는 거야"

그때 난 내가 미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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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틀 아래 빨간색 글씨는 내가 느끼는 대로 편하게 한 번역이다. 'Die Stärkeren'은 시집에서처럼, '강한 자'일 수도 있지만, 화자 스스로 자신이 밉다고 했으므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자신이 미울 정도로 부끄러운 말이어야 앞뒤가 맞다. 친구들이 했던 표현도 당연히 화자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은 화자를 두고, '독한 놈' 또는 '지독한 놈' 정도의 표현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 여기저기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들이 한때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라면 가슴이 더 찢어질 텐데,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향해 '독한 놈'이라 했으니 스스로가 불현듯 미울 수밖에.

 

그렇다고 친구들이 모두 적군을 향해 용기 있게 맞서다 죽은 이들이냐면, 그중 누군가는 망명길에서 죽음을 맞았고, 또 누군가는 도망치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택했다. 삶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죽음의 그늘 속에 불안해 하던 이들이 결국은 삶마저 지키지 못 하고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친구를 독하다고 하는 것도 꼭 비난을 실은 말은 아니다. 다 까먹은 땅콩껍질을 버리려다 우연히 그대로 있는 땅콩을 발견했을 때, 분명히 다 확인했는데 아직도 하나가 남아 있음이 참 의아할 것이다. 만일 그때의 땅콩이 살아 숨쉬는 객체였다면 분명히 "이 지독한 놈"이란 말이 절로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경우와 비슷할 거라 생각된다. 다들 죽어간 세상에서 화자는 어찌어찌 살아 남았다. 그러니 그렇게 살아남은 게 독하단 소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전쟁의 후유증을 감당해야 했다. 살아남아 다행이었지만, 화자처럼 때로 그것이 부끄러움이었고 자기혐오이기도 했다. 또 누군가에게는 살아남은 것이 평생의 고통이기도 했다. 언젠가 정리할 생각이지만,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씨 이야기'같은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오랜만에 찾은 책을 펼치며, 짧은 시 하나를 포스팅 해 보았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두 번째다. 지난번에는 같은 시집에 수록된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관해 포스팅했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상흔은 살아남은 자를 부끄럽게 하고, 서정시를 쓰던 시인에게 더 이상 서정시를 쓰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예술에 있어서의 참여는 때로는 선택이 아닐 수 있다.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에 있어 '당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내가 부끄러웠다'라고 쓸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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