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또 하루

94년의 자작나무..

by 비르케 2008. 10. 26.
300x250

지금으로 부터 14년 전, 그러니까
1994년 10월,
나는 난생 처음으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독일... 그렇게 나의 무모한 여행은 시작된다. 

당시 모 출판사에서 소설부분 신인상을 받고 나서,
이대로는 경험이 적어서도 아무것도 못 쓸 것만 같은 느낌으로, 
내 인생에서의 새로운 획을 한 번 그어 보자는 일념 하나로,
나는 그렇게 독일행을 떠올렸었다.  

그러나 계획을 감행하기에 가장 큰 장벽은 바로 '자금'이었다.
비행티켓이라도 끊어야 출발을 할 것이기에..
독문과를 다니는 내내,
학과 특성상 방학마다 있는 '어학연수 프로그램' 공고문을 보면서도
마음속으로 그저 손가락만 빨아야 했던 나로서는
먹고 살기도 빠듯한 집안 형편에 
'독일'이란 그저 요원한 꿈만 같았다. 

그러던 중, 당시 방송을 통해 알려진 한 베낭여행가와
우연히 친분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는 거의 달동네같은 곳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살던 집을 안 보았더라면
나의 '독일행'은 언감생심, 그저 '꿈'에 불과했을 거라 늘 생각한다.

그의 도움으로 싼 가격에 비행티켓을 끊었다.
그런데 문제는 입국을 '파리'로 한다는 점..

'뭐, 공항에서 눈 좀 붙이고 나서 '독일' 비행기 뜰 때 잡아타면 되겠지.'
나이가 어려서 '파리'가 '독일'의 옆 집이나 되는 양,
용기백배,
'에어프랑스' 편으로 '파리'를 향해 떠났는데...

파리를 경유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우리나라에서 뜬 비행기가 도착하는 곳은 '드골 공항'이지만, 
인접국으
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곳은 '오르세 공항',

결코 두 공항 사이가 오가기에 만만치 않다는걸...
더군다나 1박이 끼어 있었으니,
'공항에서 눈 좀 붙이면 되겠지.' 하는 짧은 생각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차마 말 못 하리 만치 쥐꼬리만한 신인상 상금과 
가족들이 쥐어준 많지 않은 돈을 가지고 외국에 온 사람이
호텔은 뭐고, 파리 숙식은 뭐겠는가..
그 1박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너무 분산될 듯 싶으니
나중에 따로 기회가 된다면...

어쨌든 중략하고, 
시커먼 이민가방을 끌고 온 밤을 헤젖고 다니던 나는 
드디어 다음날 '오르세 공항'에서 다시
'독일'도 아닌, 이번엔 '스위스 바젤'을 향해 떠났다. 

'바젤'은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독일의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
그 곳에 도착하니, 그 여행전문가의 말마따나 '프라이부르크'로 들어가는 버스가 
바로 공항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단풍이 곱던 고향을 떠나 새로이 도착한 바젤에는 
차가운 겨울성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와 함께 너무도 차가워만 보이던 사람들..
그게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리고 본 유럽인들의 첫 인상이었다.

버스를 타고 프라이부르크로 간 다음, 
그 여행전문가가 가르쳐 준 집에 겨우겨우, 어찌어찌 도착하니 
예쁘장한 한 아가씨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바로 '페이샹'..

원래 그 여행전문가가
거기 산다며 가르쳐 줬던 이는
어디론지 이사를 가고,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페이샹'은 바로 그 집에 세들어 사는 타이완 아가씨였다.  

마침 비어 있는 방이 있다며, 
주인은 막막해 하는 나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고, 
그렇게 나의 첫 독일 생활이 우연한 사건의 연속으로 서서히 전개되었다. 

뜻하지 않게 방을 쉽게 얻게 되었고, 
새롭게 펼쳐진 외국에서의 생활에도 가슴 벅찰 무렵,
주인과 '페이샹' 사이에 흐르던 이상한 기류가
차츰 내게로도 옮아왔다.
주인이었던 여자는 약간의 '신경 질환'이 있는 사람이었다.
별 일 아닌데도 바르르 성을 내고, 자신이 세 내준 이들의 방을
살금살금 들락거렸다.

그게 다가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물건이 '페이샹'의 방에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거기에 페이샹은 억울한 듯 울고불고...
결국 독일어가 나보다도 더 서툴던 '페이샹'을 대변해 주던
내게까지 날벼락이 떨어졌다.  
"모두 다 일주일 안으로 나가!"...

그러고 나서 다음날 그녀는 그 "
나가!" 라는 말을 나에 한해서만 철회했다.
과장된 미소와 몇 번을 거듭한 사과와 함께...

하지만 페이샹이 떠나고 난 집은 내게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물 위의 기름같은...
집에만 오면 어쩐지 우울해 지곤 하던 날들이 계속되던 그 때,
그래도 내게 의지가 되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내 방 창문 앞 자작나무" 였었다.

창문을 가로질러 풍경을 반으로 가르고 서 있던 자작나무...
솔직히 그다지 예쁘다는 생각은 안 드는 나무였다.    
특히 머리를 산발한 듯한 나뭇가지들,
그게 내 창 앞을 떡 하니 가린 채로 버티고 있으니 예쁠 리 만무했지만,
어느 결엔지 내가 그 나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내 방문에 아무리 귀를 바짝 대고 들어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 할
한국말로
주저리 주저리...

그렇게 '자작나무'는 
외롭던 첫 외국에서의 삶 동안
나를 보듬어 주는 유일한 대상이 되어 주었었고,
그 이후 독일에 세 번째 들어온 지금으로서도
그 때를 떠올리면
특별히 더 눈이 가는 나무이다.

또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나의 닉네임 '비르케(Birke; 독일어로 자작나무)'도 
그 시절에의 돌아봄의 일환으로 스스로 붙여본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내가 살던 그 3층 창문에서 바라보노라면,
  
살랑이던 작고 노란 잎새들과
그리고 하얀 줄기를 가지고 있던 자작나무...

오래된 자작나무의 줄기가
터지고 갈라져 안쪽의 갈색빛 속이 드러나 보일 때마다
나 또한 지난날 생각에 괜스레 문득 목이 메어옴을 느낀다.   

 

반응형

'하루 또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눈 내린 날에..  (0) 2008.10.30
버스에 올라...  (0) 2008.10.29
도시락 이야기  (0) 2008.10.07
선거날  (0) 2008.09.28
킨더위버라슝 (Kinderüberraschung)  (0) 2008.09.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