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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 작별인사

by 비르케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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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노이드가 지배하는 미래의 세상, 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은 또 어떤 결과를 부를까. 김영하의 장편소설 '작별인사'는 그동안의 수많은 영화나 소설을 통한 테제를 다시 각인시킨다. 인간은, 그리고 그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김영하 - 작별인사 

집에 놀러 온 친구가, 김영하의 소설 '작별인사' 읽어봤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는 내게,

"김영하 소설, 어때?"

하고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의 작품은 '살인자의 기억법' 하나만 읽었는데, 그나마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소설을 나중에 읽게 됐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고, 원작은 원작대로 또 좋았다.

 

'작별인사'를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 대 휴머노이드, 내지는 휴머노이드 대 휴머노이드가 대치된다. 미래의 휴머노이드, 즉 인간의 형상을 한 로봇들의 이야기는 이미 친숙한 주제들이다. 어찌 보면 동화처럼 단순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 철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고심하게도 만든다. 

 

 

죽은 직박구리를 발견하는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운동으로 생기가 충만해져 돌아온 작품속 화자 철이와 반대로, 죽은 채 마당에 떨어져있던 직박구리... 살아있는 생명은 언젠가 소멸한다.

 

이 날 직박구리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던 철이와 달리, 아버지는 의외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그저 홈스쿨링 중인 아들에게 지식 하나 더 넣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보이는 그다. 언제나처럼 착한 아들은 아버지가 일러주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인다.

 

여기까지만 해도,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아일세.', '아무리 홈스쿨링이라 해도 저렇게 부모의 설명을 잘 듣고 있는 아이가 있을까?' 했다.

 

사실은, 휴먼매터스 연구원인 아버지가 만든 휴머노이드들 중 하나가 철이였던 것. 일반 휴머노이드들보다 더 진보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인간과 가장 비슷한 로봇이다. 그 사실을 정작 철이만 모르고 있다.

 

 

작별인사 김영하 소설

미래의 한 시점.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남한과 북한도 이미 통일되어, 평양이나 대동강이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휴먼매터스라 불리는 안전한 거주지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철이. 아버지와의 생활이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철이는 아빠를 마중 나갔다가 별안간 납치되다시피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인간이 발명한 휴머노이드들 중에 미등록 상태인 로봇들이 주로 잡혀와 있는 곳이었다. 이제껏 자신은 당연히 인간인 줄만 알았던 철이로서는 자신의 실체에 대한 의구심을 애써 모른척하고만 싶다. 

 

수용소에서 지낸 날들은 철이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곳을 탈출해 도달하게 된 로봇폐기장에서 그는 또 다른 세상을 본다. 부서지고 수명을 다한 로봇들이 그들만의 네트워크에 머물며 자신들의 클라우드를 모아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세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 육체와 정신은 더이상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오래전 수용소를 함께 탈출했던 선이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인간을 위해 복제된 클론이었다. 그러나 선이는 리얼 인간이 거의 사라진 시점에, 세월을 따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으로 선이 앞에 선 철이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소설 초입에서 죽은 직박구리를 통해 살아있던 것의 죽음을 보여준 것과 대조적으로, 휴머노이드와 클론을 이용해 기를 쓰며 영생을 갈구하는 미래 인간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던 소설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오래전에 본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를 떠올렸다.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이름도 철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철이와 엄마는 은하철도 999를 타야만 했다. 영생은 선택받은 자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영화 '아일랜드'도 떠올랐다. 복제인간들의 뇌에 특별한 기억을 심어주어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으로 인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계열의 클론들이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 인간의 부품 역할을 위해 태어난 그들 속에서, 어쩌다 하나 오류가 발생해 오리지널의 기억 일부가 섞여들어가는 바람에 일탈이 발생한다. 이 소설 속 휴머노이드 철이처럼, 아일랜드에 나오는 복제인간들도 특정한 공간에, 특정한 이유로 갇혀 있는 것을 보호받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더 오래전 영화 '토탈리콜'도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는 실제 우주여행을 다녀오지 않더라도 의식 속에 여행 기억을 이식해 주는 여행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기억이 조작된 주인공은 화성 여행을 시도했다가 에러가 발생한다. 이미 그는 화성에 있었던 적이 있고, 그의 기억은 조작되었기에 기억을 재삽입하는 과정에서 예전 기억이 오히려 되돌아와버리고 만다. 기억이 돌아온 순간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이 그를 공격하게 되고 그에게는 화성에 가야 할 목표가 생겨난다. 1990년대 영화인데 당시로서는 매우 쇼킹한 줄거리였다. 더 쇼킹한 것은, 그 원작이 더 옛날 옛날이었다는 점.

 

사실 이런 테마는 수없이 반복되어 이제는 식상한 감도 있다. 가끔은 동화 같은 느낌도 들만큼 먼 세상 이야기 같을 때도 있다. 그런 상상을 가장 먼저 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가 궁금할 뿐.

 

"육체 없이 의식만 백업해서라도 영생을 누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 

소설 속에서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일 것 같다. 그게 가능한 세상이 온다면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영생을 얻고자 하지 않을까. 소설 속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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