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들이 갈비탕집에 들르게 되면 으레 먹게 되는 건 냉면이다. 그래서 다들 갈비탕을 외칠 때도 홀로 비빔냉면을 먹을지 물냉면을 먹을지 잠시 고민하게 된다. 특히나 무더운 날에는 갑자기 얼음 동동 뜬 물냉면이 당기다가, 금세 또 식초 솔솔 뿌린 화끈한 매운 맛이 더 낫다 싶기도 해서 결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며칠 전 경북 포항에 갔다가, 요기를 하러 어느 갈비탕집에 가게 되었다. 늦은 점심이라 시장기가 돌아서 미리부터 비냉 물냉 고민하며 들어갔는데, 식당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메뉴가 이제까지 보던 것과 좀 달랐다. 갈비찜 갈비탕에다 냉면도 있긴 있는데, 내가 생각하던 그 두 가지 냉면이 아니었다. 이름하여 '비빔물냉면'.
영남 쪽에만 있는 음식인 것 같다. 비냉을 고를지 물냉을 고를지 고민할 필요 없이, 두 가지 맛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비빔물냉면을 나도 모르게 얼른 주문했다. 맛이 어떨지 상상해 보니 그런대로 떠오르는 맛이 있다.
잠시 후 드디어 '비빔물냉면'이 나왔다. '매운 물냉면' 내지는 '육수를 가미한 비빔냉면'... 상상하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그래도 그중에 눈에 띄는 한 가지 낯선 점은 있었다. 삶은 계란이 아닌 육전을 썰어 고명으로 올린 것이다. 냉면 위에 올려진 계란 정도는 먹는 세미베지터리언이라 늘상 냉면을 먹을 때면 그나마 단백질 보충은 좀 되는 것 같았는데, 육전이 고명으로 올라오니 요새 애들 표현마따나 '노답'이다.
육전을 건져 다른 사람에게 주고 면이랑 깍두기만 깨작깨작... '후르륵후르륵' 빨아올리던 냉면이었건만 깨작깨작이라니...
그렇게 먹고 있자니, '매운 물냉면' 내지는 '육수를 가미한 비빔냉면'은 어느새 '김치국물을 넣은 물냉면' 내지는 '물에 만 비빔냉면'으로 바뀌어갔다. 영남지방의 음식을 탓하는 게 아니라, 고기를 못 먹는 나로서는 육전과 어우러지는 냉면의 진한 맛을 알 리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내게 맛이 어떠냐 물었다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신 성철스님 흉내라도 내며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냉면은 냉면이요, 깍두기는 깍두기인데, 그 냉면이 내가 생각한 냉면이 아니요, 그나마 다행히도 깍두기는 내가 알던 아삭하고 상큼한 그 맛이 맞소."
하지만 심심하고 밋밋한 음식의 맛이 타지에서 온 내게 안 맞았던 것이지, 그쪽 사람들에게는 분명 고향의 맛이 깃든 훌륭한 음식일 것이다. '포항' 하면 떠오르는 특산물 과메기도 먹는 사람만 먹고, 찾는 사람만 찾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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