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다. 연일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늘도 어두침침하고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런 날은 집에서 창을 통해 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지만, 마지못해 밖으로 나와도 뜻밖에 나름 운치가 느껴진다. 창으로는 볼 수 없던 또 다른 세상과 만나고, 비가 올수록 색이 올라오는 수많은 사물들과 그 사물들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내음까지, 그로 인해 우중충하던 하늘은 그마저도 차츰 마음에 들어온다.
운전 중에 장대비가 한바탕 쏟아지기에 트렁크에 늘 비치되어 있는 우산을 떠올렸다. 있겠지, 있겠지 하면서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단 듯 나를 향해 쏟아지는 빗줄기에, 꼭 있을거야 있을거야 하며 트렁크를 열었는데, 이럴 수가... 없다.
그래도 이때까지 살면서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면 그나마 "완전" 물에 빠진 생쥐꼴은 면한다는 사실은 알게 된지라, 머리만 가리고 장대비 속을 걸었다. 돌아가신 아빠처럼 비가 와도 뛰지 않는 나... 그래, 가방으로 머리라도 가리면 비를 훨씬 덜 맞는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뛰어가면 덜 맞는지 똑같은지에 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실험다운 실험을 해보지 못 한 터였다. 더군다나 아빠도 나도 달리는 거나 걷는 거나 별 차이가 안 나는 사람들이다. 달리기를 정말 못 해서, 뛰어봤자 그게 그거다.
예전엔 비가 오면 우산 없이 그냥 맞고 다녔다. 엄마는 지애비 닮아 그런다고 핀잔을 주곤 했지만, 여름 온기로 덥혀진 체온을 식히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참 시원하고 좋았다. 청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 남들이 다 뛰어도 홀로 느긋하게 그 비속을 걸었다.
지금? 지금은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 우산이 없어 이번처럼 잠시 비를 맞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유유자적 비속에 서지 않는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는지는 몰라도(정말 모를까마는..), 더 이상 비 속에 서 있지 않고,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걷지도 않는다.
우산은 두고 온 날,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비속을 걸으며 그때를 잠깐 떠올려보았다. 틀림없는 사실은, 그럴 수 있었고 그래도 됐었던 그때가 무지 그립다는 점,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그 모습일 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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