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오래 전 물건들이 꽤 많다.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마련한 것들이라, 해를 거듭할수록 정리한다고 해도 이 정도다. 그 가운데는 카세트테이프들도 여럿 있는데, 다행히도 포스팅 하려다 생각나서 찾아보니 아직 슈베르트 겨울나그네도 그대로 있다.
2012년 세상을 떠난 불멸의 목소리,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scau) 버전이다. 원래 물건을 많이 아끼는 편이라, 안 들을 때는 케이스에 고이 모셔둔 채로 소장해서 외장도 세월이 무색할 만큼 깨끗하다.
이 테이프를 오랜만에 케이스에서 꺼내 보니 우선 참 반갑다. 가지고는 있지만, 카세트가 없으니 재생은 할 수 없는, 정말 추억 속의 물건이다. 당시 클래식 음반들은 깨끗한 음질을 표방하는 돌비 시스템(D가 좌우로 겹쳐진 마크)으로 제작되어 다른 음반들보다 가격적인 면에서도 꽤 부담이 되었다. 리어카에서 불법복제 테이프가 판을 치던 때였지만, 그런 시절에도 클래식 음반만큼은 제 값을 치러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정말 좋아하지 않고서는 사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1983년 9월 3일에 제작되었다고 찍혀있지만, 나의 구매 연도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90년 전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카세트테이프들은 오래 듣다 보면 늘어지기도 하고 카세트에 걸리기도 해서 볼펜 등을 이용해 끄집어내다가 손상이 가서, 가끔 드라이버로 케이스를 열어 손상 부분을 잘라내고 괜찮은 부분끼리 연결하는 수술도 해 주곤 했는데(연결 부분은 음이 끊기고 튕겨짐), 돌비 시스템으로 제작된 것들은 더 고급 소재를 썼던 것인지 테이프 손상도 더 적었다. 일단 색깔부터 달랐다. 일반 카세트테이프들은 안에 든 비닐띠(음악이 인식되는 부분) 색깔이 갈색이었지만, 돌비 시스템으로 제작된 테이프들은 검정색이었다.
오랜만에 본 테이프에 대한 반가운 마음은 여기까지 접고, 그 곡들 중에 특히 좋아했던 곡을 떠올려보니, 마지막 곡 Der Leiermann이 얼른 떠오른다. 선율이 아름다우면서도 전체적 톤은 많이 가라앉아 있는 곡이다.
사랑을 잃고 홀로 방랑의 길에 나선 청년은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대상들에 감정을 실어 노래한다. 연인의 집 앞에서 마주한 풍향계 부터, 자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 얼어붙은 세상, 안식과도 같은 보리수 나무,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고픈 냇물, 우연히 발견한 휴식처 오두막, 우편마차 소리에 흥분되는 자신의 마음, 어디서부턴가 곁을 맴도는 까마귀, 그리고 결국 거리에서 라이어를 돌리고 있는 노인까지... 청년의 외로운 여행길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치 독백처럼 펼쳐진다.
서리를 맞아 하얗게 변했던 머리카락이 다시 검정색으로 바뀌자, 청년은 자신의 젊음을 오히려 저주한다. 그러다 길에서 라이어(Leier: 큰 상자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면 음악이 나오는 악기) 돌리는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열심히 라이어를 돌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만드는 음악에 관심이 없고, 노인의 (동전을 받기 위해 둔)접시는 비어 있는 채 그대로다. 청년은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가엾은 노인이여,
나 당신과 함께 가도 될까요?"
"나의 노래에 맞춰
당신의 라이어를 연주해 줄 수 있나요?"
겨울나그네 전곡: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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